'바지대통령'으로 메드베데프 부총리 낙점벨로루시와 합병과정서 개헌… 통합국가 대통령 나설 수도실권총리로 장기집권 수순… 형식적 지위 낮아 '이중권력' 불가피 전망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55) 러시아 대통령이 권력 시나리오의 일단을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일 세계 최대 국영 가스회사인 가즈프럼의 회장을 겸하고 있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42) 제1부총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 밝혔다.

메드베데프 부총리도 다음날인 11일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푸틴 정권이 8년간 이룬 성과를 실질적인 프로그램으로 전환시키겠다”며 “푸틴이 내년 대선 이후 총리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화답했다.

헌법상 3선 연임 불가 규정에 묶여 내년 3월 실시되는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는 푸틴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후 권력을 유지하는 시나리오를 놓고 온갖 억측을 불러 일으켰다.

집권 2기, 8년간 정권을 장악했음에도 지지도는 여전히 70%가 넘는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넘겨준 이후에도 최고 실력자로서의 자리를 고수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지난 10월 “총리로 취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언급한 것 말고는 전혀 속내를 내비치지 않아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아예 개정해 다시 대선에 나서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까지 했다. 앞서 2일 실시된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집권 통합러시아당이 개헌선인 3분의 2를 훨씬 넘는 의석을 획득한 것도 이 같은 추론의 배경이었다.

물론 그가 “개헌하지 않겠다”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누차 공언해 개헌은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런 점이 오히려 그의 권력 시나리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 이유이기도 했다.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푸틴의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것은 그가 17일 열리는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유권자들의 지지도로 보아 내년 3월 2일 치러지는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틴의 후계자 지지 발언 한마디로 내년 대선까지의 러시아 정국이 대체적인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푸틴 대통령 역시 메드베데프 부총리의 ‘실세 총리론’에 아직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현재의 정국 흐름상 총리직을 새로운 권력의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 푸틴 대통령이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낙점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한명의 제1부총리인 세르게이 이바노프(54)와 지난 9월 총리로 전격 발탁된 빅토르 주브코프(66), 그리고 메드베데프가 트로이카 후보군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무게중심의 추는 민간인 신분으로는 최초로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업무추진력에서 탁월한 평가를 받아온 이바노프 부총리에 넘어가는 듯 했다.

메드베데프는 가즈프럼을 경영하면서 쌓은 친 시장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나이와 경륜이 너무 일천하다는 인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메드베데프의 이런 점이 푸틴 대통령에게는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했다. 이바노프 제1부총리의 경우, 강력하고 절제된 통치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푸틴 대통령과 비슷한 성향을 보여왔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푸틴의 낙점을 망설이게 했던 요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차기 정부에서 대통령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실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정치지분을 갖고 있는 이바노프는 이런 시나리오에는 맞지 않는 다소 ‘위험한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역으로 나이도 한참 어리고 무엇보다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없고 온순한 성격의 메드베데프를 돋보이게 한 요인이 됐다. 퇴임 후에도 ‘배신’의 우려 없이 안정적으로 정국을 관리하는 데는 메드베데프가 적임자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대통령 메드베데프, 총리 푸틴’으로 구도가 일단락되면서 관심은 이제 대통령과 총리의 역학관계에 모아지고 있다. 대통령 메드베데프가 총리 푸틴에게 충성을 다하는 구도이겠지만, 헌법상 총리가 대통령보다 밑이라는 게 현실적인 문제다.

총리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려면 대통령의 권력을 상당부분 가져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실질적 권력은 총리에 두되, 형식적으로는 대통령의 지위를 유지하는 ‘이중권력(dual power)’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중권력이 야기할 수 있는 권력의 불안정성이다. 정치적 취향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기울어져 있고, 영국의 전설적인 하드록 그룹인 ‘딥 퍼플’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메드베데프와 ‘국가 독점주의’ ‘중앙집권적 권력구도’를 특징으로 하는 푸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현재로서는 갈등구조가 표면화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 이런 정치철학의 차이로 인해 메드베데프가 임기 중 대통령직을 포기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고 봐야 한다. 푸틴의 권력 시나리오와 관련해 또 하나 흥미있는 가설은 러시아와 벨로루시의 국가통합, 그리고 이에 따른 권력구도의 대 개편설이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분리된 양국은 90년대 후반부터 다시 국가를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러시아는 통합으로 보다 강력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고, 그렇잖아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심한 벨로루시는 가스와 석유 등 러시아의 막대한 에너지 자원의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양국 유권자들도 거부감도 그리 크지 않다.

크렘린궁은 공식 부인했지만, 13, 14일 이틀간 벨로루시를 방문하는 푸틴 대통령의 주요 의제도 양국 통합에 관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번 정상회담 중 전격적으로 양 정상이 통합국가 헌법안에 서명할 수 있다는 분석도 일부에서 제기됐다. 푸틴 대통령은 통합국가의 대통령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은 통합의회의 의장직을 맡는 구상이다. 이럴 경우 헌법 개정은 불가피해 푸틴으로서는 이를 통해 권력욕이라는 비난을 받을 필요없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통합국가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

크렘린궁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내년 대선 전까지는 양국의 통합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 문제가 푸틴 대통령의 권력구도와도 밀접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

황유석 한국일보 국제부 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