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선진화재단 탐구

한반도선진화재단 박세일 이사장.
“이제는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한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대의 요구다. 경제의 선진화와 삶의 질의 선진화가 함께 가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튿날 처음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미래 비전을 강조하며 내뱉은 일성(一聲)이다. 차기 정부 국정운영의 청사진을 소상히 밝힌 이날 회견의 방점은 단연 ‘선진화’에 찍혀 있었다.

비단 이 당선인이 내건 국정운영 슬로건뿐이 아니다. 바야흐로 정치권을 중심으로 선진화의 깃발이 넘실대고 있다. 모든 정파가 선진화를 부르짖는 양상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자신이 최근 창당한 신당(자유선진당)의 이름에 ‘선진’을 명기했다. 약칭은 아예 선진당이다. 뿐만 아니다.

곧 저물게 되는 범 여권의 새 간판으로 떠오른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출범하게 되는 통합민주당(가칭)의 이름에 ‘선진’을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바랐던 당명은 선진민주당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파 간에 ‘선진화 주인 논쟁’도 심심찮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지난 1월17일 이 당선인이 정부조직 개편안 처리에 대한 협조를 구하고자 손 대표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 당선인과 대화를 이어가던 손 대표는 불쑥 “그런데 (이 당선인이) 제가 썼던 것을 뺏어 갔어요. 원래 선진이 손학규(의 것인데)…. 탈당해서 새롭게 정치를 시작할 때 내건 게 선진평화였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에 이어서 선진화의 시대를 열어간다는 워딩(표현)도 그대로 갖다 썼지요”라는 말을 툭 건넸다.

그러자 이 당선인은 다소 난처한 듯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좋은 건 같이 써야죠”라고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사실 정치권에서 선진화 선점(先占)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선진화 담론의 원조는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선진화재단’(한선재단)이라는 게 정설이다.

박 교수는 평소 남다른 신념을 밝혀온 국가 선진화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2006년 9월 한선재단을 발족시켰다.

그 훨씬 전인 2004년에는 4월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의해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발탁됐다가 이후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아 한나라당의 집권전략과 국가비전으로 선진화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연혁에 미뤄 선진화를 사용할 수 있는 우선권은 ‘저작권자’인 박세일 교수를 한때 영입했던 한나라당에게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진화라는 용어 자체는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최근 대부분 정치세력이 선진화를 앞다퉈 주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제(諸) 정파가 갑작스레 백가쟁명 식으로 선진화를 외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한선재단 이용환 사무총장은 “정치는 현실주의 아니냐”며 “오늘의 시대정신이 선진화라고 봤기 때문에 여러 정치세력이 이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사실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선진화는 정치적인 측면이 다분하다. 국민들이 듣기에 “선진국으로 가자”는 메시지는 단순명쾌하면서도 호소력이 짙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속에 알맹이가 빠져 있거나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진화를 가장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이념으로 집대성한 주역은 한선재단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박 교수와 한선재단이 주창하는 선진화는 어떤 배경에서 비롯됐으며 또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박 교수의 국가 선진화 신념은 지금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후진국으로 퇴행하느냐 하는 중대기로에 서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활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어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2020년 이전에 선진화를 달성하지 않으면 선진국 도약의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현 시대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풀어나가야 하는 당면과제이자 시대정신이 바로 선진화인 셈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선진국 진입에 대한 짙은 회한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당시 국가발전 전략으로 내세운 ‘세계화’를 통해 선진국 도약을 꿈꿨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며 허망하게 무산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인지 박 교수가 주창하는 선진화 전략은 허울 뿐이었던 세계화와 달리 체계적이다. 5대 과제로 내세운 경제적 선진화, 정치적 선진화, 사회적 선진화, 문화적 선진화, 국제적 선진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부민덕국’(富民德國)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즉 부유한 국민과 품격 있는 나라다.

이 사무총장은 “어찌 보면 이상(理想)국가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이를 지향점으로 삼아 전략을 만들고 실천해 나가면 분명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선재단의 소명과 역할은 바로 부민덕국에 이르는 선진화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한선재단에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정책과 비전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면면도 화려해서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쟁쟁한 인사들을 대거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부 조직인 ‘선진화 싱크탱크’와 연구위원, 지도위원 등을 합치면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학자, 교수들이 선진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재단측 설명이다. 전문가 풀(pool)로만 보면 국내 최대 민간 싱크탱크라고 해도 무방한 규모다.

일각에서는 한선재단이 보수ㆍ우파 진영의 싱크탱크일 뿐이라는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창용 서울대 교수, 현인택 고려대 교수 등 재단 소속의 일부 학자들이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단측은 한선재단의 지향점이 ‘대한민국 선진화를 위한 정책과 비전을 개발하는 비(非)정파적 민간 싱크탱크’라고 반박한다. 박 교수 역시 여러 차례 “보수와 진보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 이 사무총장은 “시각에 따라서 보수 인사들이 많이 참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며 “한선재단은 기본적으로 보수, 진보 모두에게 열린 조직이며 보수와 진보가 상호협력을 통해 선진화를 이뤄나가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선재단이 특정 정파와 손을 잡는 것은 스스로 생명을 단축하는 일”이라며 “우리는 한 시대만 반짝하는 게 아니라 다음 세기까지 이어지는 국가 이념을 뿌리내리는 게 목표”라고 덧붙였다.

모든 정파로부터 구애를 받는 선진화 담론을 탄생시킨 한선재단이 그들의 바람대로 정권에 관계없이 오직 나라와 국민만을 위한 정책의 산실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 관심 깊게 지켜볼 일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난해 4월 한선재단은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국정과제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