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개방 3000 구상' 탁상공론 논란… 북한 대남 강성 행보 진짜 속내는 민족경협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첫 대화도 하기 전에 삿대질부터 하는 모양새가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양상이다. 3일, 북한은 국방부가 전날 보낸 답신 전화통지문을 '한갓 변명'으로 일축하고 '군사적 대응 조치'를 거론, 서해교전 같은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내비쳐 긴장의 파고를 높였다. 이는 북한이 대선 전후는 물론, MB 정부 출범에 대해서도 침묵을 유지하던 것과는 180도 다른 태도여서 그 저의와 향후 행보에 의문과 불안을 교차시키고 있다.

북한은 올초 신년 공동사설에서 “우리는 10ㆍ4선언을 철저히 관철함으로써 대결시대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북남관계를 명실공히 우리 민족끼리의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키며 평화번영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남북경협’을 강조하는 등 유화제스처로 이전 신년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북한은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을 밝히자 태도가 돌변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하면 남북협력에 새 지평을 열겠다는 대북 입장을 문제삼은 것. 북한은 같은 달 29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시론을 통해 ‘비핵ㆍ개방ㆍ3000구상은 비현실적이며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1주일 뒤인 3월 6일엔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 정부 수석대표가 북한의 인권 상황을 거론한 것을 문제삼아 남한 정부를 “파쇼통치로 남조선을 참혹한 인권의 불모지로, 민주의 폐허지대로 만들었던 독재정권의 후예들”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했다. 이어 3월 24일 개성공단 남측 당국 인원 전원 철수 요구, 28일 서해상에서 미사일 발사, 최근 군사적 대응 운운하는 등 남북 간 긴장을 에스컬레이트해왔다.

이제 북한의 다음 수순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들이 공언한대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경우 남북관계는 오랜 기간 단절이 불가피하다. 이에 따른 남북 간 갈등 심화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도 악영향을 준다. MB정부의 대북 대응책이 주목받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대북 입장에 관한한 별다른 변화가 없다. 대선 공약으로 제시한 ‘비핵ㆍ개방ㆍ3000’구상을 유일한 원칙이자 대북 정책으로 고수하고 있다.

‘‘비핵ㆍ개방 3000’ 구상은 1단계 비핵화 → 2단계 북한의 개방화, 정상국가화 → 3단계 경제발전을 통한 남북경제공동체 건설로 짜여 있다. 정책수단으로 한미공조를 강화해 북한을 비핵화한 뒤 한국이 경제적 지원에 나서 인권유린, 테러지원, 대량살상무기 개발확산을 일삼는 국가라는 오명을 벗게하여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편입하게 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위한 국제적 여건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북한은 “비핵ㆍ개방ㆍ3,000구상’이 비현실적이고 일방적”이라며 못마땅해 한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들은 “북한은 체제가 붕괴되는 순간까지 핵을 포기하지 않는데 남한 정부가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서보혁 이화학술원 평화학연구센터 연구위원도 “정부의 '비핵ㆍ개방ㆍ3000'은 논리상 ‘북한이 먼저 ∼하면, 남한이 ∼해주겠다’는 조건부 혹은 선후관계인데, 남한의 상응조치 혹은 유인없이 북한에 행동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 정부는 남한의 제1 관심사인 북핵문제에 북한의 관심사인 경제지원 및 협력을 연계하고 있는데, 북한은 자신의 제1 관심사인 안전보장을 미국으로부터 얻고자 하고 있기때문에 연계전략은 실효성이 극히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반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수립을 도왔거나 지지하는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행태 교정을 위해 현재의 정책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새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낸 서재진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비핵.개방.3000'은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 정상 국가화, 경제 회생 등을 위해 6자회담틀 내에서 '행동대 행동' 원칙에 입각해 추진될 것"이라며 "비핵화와 연계하지만 북한 무시전략도, 강경 압박도 아니라서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TV 촬영(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한 북한 로동신문의 논평(맨아래)

이와는 달리 북한의 실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북한통들은 MB 정부의 대북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자칭 북한 전문가라는 학자들의 논란 또한 탁상공론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노무현 정부는 ‘일방적’이긴 해도 각론에 아마추어적인 밑그림이라도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는 각론이 없어요. 총론도 공약 수준의 ‘원칙’만 밝히고 있어 북한과 구체적으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맹이가 없습니다. 답답해요.”

북한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의 동포 최모 씨는 요즘 이명박 정부의 대북 행보에 대해 “답답하고 화가난다”고 했다. 최 씨는 선친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 인연으로 북한 최고위층과도 선이 닿는 인물로 북한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최고의 북한통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 언론을 보면 북측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기껏해야 북한 사정을 유추해 실재에 다가가려 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어요.”

그러면서 최 씨는 북한의 연이은 대남 강성 발언과 위협을 2005년 8ㆍ15 행사차 남한을 방문한 북한 수뇌부가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사건에 비유했다. “그때 남한을 방문한 (북한)고위인사가 그러더군요. 우는 아이 뺨을 때리면서까지 신호를 보냈는데 남조선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최씨에 따르면 당시 북측 고위급 인사가 6ㆍ25 전쟁의 순국선열이 대거 안장된 현충원을 찾은 것은 남북관계에서 북한이 크게 변하려 하는 만큼 남한도 기존의 틀을 깨고 ‘민족 대 민족’으로 경제협력, 나아가 주변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남북공존의 길을 모색하자는 메시지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최근 북한의 대남 강성 행보 역시 남한과의 민족 경협, 남북공존을 강하게 요구하는 북측의 역설적 표현이라는 게 최씨의 분석이다. 북한이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해방 60년사 정리’또한 ‘민족’을 기준으로 북한체제를 재점검하고 남한과의 관계설정을 새롭게 하려는 것으로 그 연장선에서 2005년 7월 ‘북남경제협력법’이 제정ㆍ공포되고, 북측 인사의 현충원 참배, 최근 북한의 강력한 메시지 등이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해부터 대남라인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야요. 이명박 정부와 새롭게 해보자고 사인을 보낸 것인데 남한은 논치를 못채는 것 같아요.”일부에서 북한의 최근 행보를 ‘새 정부 길들이기’라거나 남한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벼랑끝 전술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에 대해 “현실을 모르는 강단 학자들의 이념용 구상”이라고 폄하했다. 북핵에 관한한 평양의 안테나는 항상 워싱턴에 맞춰져 있을 뿐이고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밝혔듯 북핵은 중국의 북한 접수 시나리오를 막을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는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처럼 남북관계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할 게 아니라 6자회담의 틀에 맡겨 놓고 남북한은 비정치적인 경협을 통해 공존과 자존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게 최씨의 주장이다.

다행히 이명박 대통령은 3일, 군 중장 진급 및 보직신고를 받는 자리에서 북측에 종래의 대남 방식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남북이 다시 대화를 통해 한단계 높은 협력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남북 협력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더욱이 대선 때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에 핵심인사로 참여한 교수는 5일, “총선이 끝나고 4월 한미 정상회담 후에 남북 간에 가시적인 변화의 모멘텀이 마련될 것”이라고 해 남북 간에 변화를 전망케 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제시할 대북 협상 카드다. 아직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의 틀이 완고한 상황에서 좀처럼 새로운 카드를 꺼내기 어려운 게 MB정부의 고민이다. 그렇다보니 대북 정책에 관한 한 ‘각론’이 부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와 관련 베이징의 최씨 등 북한 전문가들은 “새로운 대북 정책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속마음을 먼저 아는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남북문제를 국제관계 속에서 다루는 것도 한 전략일 수 있지만 그 하부개념으로 존치시킬 경우 남북간에 위기를 자초하거나 접점을 찾기 어려운 평행선을 달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요즘 북한의 진짜 속마음은 뿔난 게 아니라 민족경협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한다.

■ 박 정부 대북 플랜 '핵·개방·3000 구상'은…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근간이다. 대선이 본격화한 지난해 초 이명박 캠프 북한 TF팀의 작품으로 고려대 남성욱ㆍ현인택 교수, 남주홍 경기대 교수,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 등이 핵심 인사로 참여했다.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의 목표는 ‘북한의 정상국가化’다. 남북문제를 민족문제에서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해결하겠다는 방향도 밝히고 있다.

‘비핵ㆍ개방ㆍ3000 구상’의 추진 로드맵은 1단계 북한 비핵화, 2단계 북한 정상국가화, 3단계 본격적인 경제발전으로 돼 있다. 궁극적으로 남북관계 정상화와 남북경제공동체를 구현해 통일기반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