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시대 北 진단 "개방해야 생존"

28일오전 연세대 은명대강당에서 개막한‘제1회세계 북한학 학술대회’에참석한 서대숙 하와이주립대 석좌교수(오른쪽에서 두번째).
서대숙(83)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1960년대부터 일제강점기하 공산주의운동 연구와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 연구를 시작해 현재까지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아 왔다. 서 교수는 김일성의 항일경력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김일성 가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동시에 김일성의 날조되고 미화된 독립운동도 엄격히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가감 없이 객관적으로 공과 과를 평가한 학자다. 그럼에도 군사정권에게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아 고국 정착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는 10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북한학학술대회'에 참석해 기조연설 'Sustaining Myth'에서 기아, 탈북, 정치범수용소 등 북한의 공산주의 실험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했지만 다음날 열린 좌담회에선 북한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29일 좌담회 후 <주간한국>과 만난 서 교수는 학자적 입장에서 책임 없는 보도와 소문, 추측의 난무를 경계했다. 그는 김정은이 아직 평가를 굳힐 만한 인물이 아니며 북한이 변화와 개방을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봤다. 동시에 미국 국적 억류자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법과 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1세대 북한연구자이자, 세계적인 동아시아 공산주의운동 연구 권위자인 서 교수로부터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김정은 시대 북한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었다.

-가족 중에 독립운동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이 연구를 시작하는데 영향을 미쳤나요?

"기독교 목사였던 부친(서창희)이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주했다. 아버지가 물론 영향을 줬다. 3ㆍ1 운동 땐 만세를 부르다 감옥에 투옥된 적도 있으시다. 우리 가족 중 열렬히 독립운동을 해서 공적을 세운 사람은 없다. (공식적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인 듯) 내가 외국(룽정, 龍井)서 태어났다는 것도 영향을 줬다. 만주는 낮엔 마적, 밤엔 공비(항일 빨치산)가 지배했던 지역이다. 마적은 쌀, 곡식을 가져가고 젊은 남자들을 데려가 비적을 만들고 여자를 데려가 부인으로 삼았다. 치안이 안 되니까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후에 연구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여러 자료를 모았고 교회 사진을 발굴했다."

-어린 시절, 룽정에 살면서 직접 겪어보거나 만나본 독립운동가가 있으신가요?

"많았다. 명동학교를 세운 김약연 목사가 계신데, 그 분에 대한 책을 썼다. 수많은 소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사, 목사들이 투옥을 당했다. 조선공산당 당수이자, 임정의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장군이 우리 마을에 와서 머물면서 경찰을 피하고 중국 관내로 들어가 공산당을 조직하고 러시아에도 가고 했었다."

-좌파의 독립운동이 한국에선 오랫동안 부정돼 왔습니다. 새롭게 '재평가'될 만한 독립운동가 혹은 단체, 역사적 사건이 있나요?

"너무 많다. 일례로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이 처음 결성됐을 때 초대 비서가 김재봉이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전혀 안 알려져 있다. 조선공산당이 6차까지 재건됐는데 그 때마다 관여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북한 정권은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젊은 김정은이 조부나 부친에 비해 어떻게 다르고, 어떤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김정일이 20년 동안 일하고 권력승계를 받았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간의 은둔 생활도 했다. 은둔하면서 선군정치를 구상했다. 23년 동안 준비한 거다. 김정은은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젊다. 김정은은 앞으로도 여러 번 넘어질 거다. 반대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추켜올릴 수도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김정은은 아직 모른다. (인사변동이 잦은데요.) 성숙한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다. 국방위원회 기구의 멤버가 다 바뀌었다. 최근 인천을 방문했던 황병서 차수가 중요하다. 박봉주 총리가 물러났다가 다시 등용됐다. 최룡해도 국방위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갔다. 1년에 3번씩이나 갈린다. 여러 번 그러는 걸 보면 그 사람들도 (장성택과 마찬가지로) 장래가 밝다고 볼 수 없다. 김정은이 쉽고 평탄하게 정치를 하는 것 같진 않다. 사상적으로도 김정은이 선전선동의 기둥인 주체사상을 언급하지 않는다. 북정권은 현재 과도기다. 선군정치 시스템을 승계해서 지어놔야 하는데 짓기 전이라 변천기로 보인다."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에서 북한 정권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과제로 군부 축소,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교류,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꼽으셨습니다. 북한 정권이 앞으로 교수님께서 제시한 힘든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북한 정권은 앞으로 선진산업국가들과 수교, 교역을 해야 한다. 프로퍼갠더가 북한을 나쁘게 얘기한다. 김정일이 코냑을 수입해서 마신다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되겠나? 기껏해야 1000달러다. (현 정권 들어 관광산업에 올인한다는 인상인데 미국서 북한 관광을 많이 가나요?) 지금도 많이들 간다. 단지 위험하다. 성경책을 호텔에 두고 나온다고 선교가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북한법을 위반한 행위다. (제프리 파울이 노동자로 보도되고 있던데요) 아니다. '선교사'다. 북한헌법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의 북한은 무신교 사회다. 나는 (북한의 종교정책과 이번 억류에 대해) 'None of your business'(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다."

-'북일수교'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아마 언제고 수교를 할 것이다. 이번에 와다 하루키 교수와도 얘기했는데, 중국입장에선 일본이 북한에 영향력을 가지면 곤란하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그 영향력을 가지려고 6ㆍ25때 100만명 이상이 죽었다. 1965년 한일수교 때 보상금을 받아서 경제발전을 해야 하다 보니, 웬만한 걸 다 사인했었다. 이북에선 쉽게 사인을 안할 거다. 식민지배 피해에 대해서도 따로 협정을 맺을 거다. 그동안 차입 혹은 보상에 대한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일본이 돈 몇 푼 쥐어주고 잘못한 일을 다 갚으려고 드느냐, 그걸 갚으려면 절하면서 사과하라는 입장이다. 일본 입장에선 납치자 문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북일 관계가 쉽지 않다. 만약 국교가 성립되면 서로 무역할 때 일본이 북한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써 넣어야 한다."

-김정은이 유엔 국제형사법정에 회부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강제성이 없다. 정치는 'the Art of the possible'이다. 가능성이 있는 걸 하는 게 정치다. (현재 김정은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탄압했다는) 증거도 없다."

-북한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나요?

"전혀 없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자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는 반증이다. 당신은 민주화 교육의 산물이다.(웃음) 이북이 언제 붕괴될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우린 안전하고 이북은 망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북은 절대 안 망한다. 정치학에서의 정권은 경제가 어렵다고, 외부정보가 유입된다고 망하는 게 아니다. 정권은 반대 그룹이 있어야 망한다. 반대세력이 생겨서 도전하기 전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현재의 북한은 반 김정은 그룹 자체가 없다. 정권은 망해도 체제는 망하지 않는다."



신상미기자 frontpage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