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무리한 요구로 정상회담 깨져" vs 北 "돈 요구는 거짓말"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당시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차 방남한 북한 사절단의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악수를 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담긴 남북 접촉 내용이 공개되면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남북 비밀 접촉과 관련한 비사(秘史)가 담긴 데다 외국 정상들과의 대화 등 민감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중국 지도자들을 통하는 등의 방식으로 다섯 차례 이상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해왔다고 공개했다. 그러나 남북 간 실무 접촉에서 북한이 과도한 경제적 요구를 해 정상회담이 무산됐다고 밝혔다. 다섯 차례의 남북 접촉에서 북한은 줄기차게 현금을 포함한 경제적 요구를 했고 이것이 정상회담 결렬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회고록의 내용과는 다른 주장을 펴왔다. 오히려 "한국 정부 측에서 먼저 돈 얘기를 꺼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MB정부 때 정상회담이 무산된 배경을 놓고 남북 간에 극명한 시각차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MB정부에서의 남북정상회담 내막을 추적했다.

'정상회담' 위한 남북 비밀 접촉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따르면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다섯 차례 이상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지난 2009년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당시 현인택(오른쪽) 통일부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만나 면담했다.
회고록 제5장 '원칙있는 대북정책'에 의하면 첫 남북정상회담 얘기는 2009년 8월 23일 북한의 김기남 당시 노동당 비서가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으로 청와대를 예방했을 때 나왔다. 김기남 비서는 청와대 예방에서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조문단이 북한으로 돌아간 직후인 8월 28일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현인택 통일부 장관에게 보내왔다. 그해 9월 김양건 부장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접촉을 위해 싱가포르에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통보해왔고, 10월 17일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났다. 그러나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회담은 중단됐다.

같은 해 11월 7일 개성에서 열린 남북 실무 접촉에서 정상회담 얘기가 나왔지만 북한이 '싱가포르 합의서' 이행을 주장해 무산됐다. 싱가포르 합의서는 우리 측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의 식량을 비롯해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임 장관은 "그런 합의서를 써준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곧이어 11월 14일 개성에서 열린 통일부-통일전선부 협상은 싱가포르 합의서 문제로 결렬됐다.

이듬해인 2010년 7월과 12월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도 정상회담 얘기가 오갔지만 북한이 대북 지원을 거론해 무산됐다고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北 '돈 요구'로 정상회담 무산?

MB정부 기간 내내 수차례 남북정상회담 논의는 모두 무산됐다. MB회고록에 따르면 가장 큰 원인은 '싱가포르 합의서' 문제로 대변되는 '대북 지원' 즉, '경제(돈)' 였다. MB정부는 북한의 과도한 경제적 요구로 인해 정상회담이 틀어졌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나아가 "오히려 MB정부가 돈 얘기를 먼저 꺼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 2012년 한 언론의 단독 기사가 주목된다. 최근 MB회고록을 가장 비중있게 보도한 <중앙일보>는 2012년 10월 26일자 '남북정상회담 돈거래설' 제목의 기사에서 외교안보 분야 전직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2009년 11월 비밀접촉 장소에 나온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대뜸 '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며 대가조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다"며, 김양건 부장이 이같은 내용의 비밀양해 각서에 사인을 요구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불러왔다.

그러나 당시 남북정상회담 진행 과정을 비롯해 남북 접촉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사실과 다르고 심지어 왜곡까지 됐다"고 주장했다. 소식통은 "당시 남북 간에 정상회담이 추진된 것은 맞지만 김양건 부장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해 무산됐다는 것은 틀린 얘기"라고 전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이 대통령의 주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오히려 한국 정부 측에서 먼저 돈 얘기를 꺼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남북 접촉에서 북한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막대한 대북지원, 이른바 '북한판 마셜플랜'을 이행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 지지 않자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전했었다.

이처럼 언론 보도와 북한 소식통의 전언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2009년 당시 남북 비밀접촉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은 10월 17~19일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부장을 수차례 만나 정상회담을 조율했다. 임 장관 외에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당시 대통령 통일 특보)과 김천식 전 통일부 차관 (당시 통일부 통일정책실장)도 김양건 부장 측과 여러 차례 접촉해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를 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평양행까지 고집했지만 김양건 부장 등이 과도한 대가를 요구해 정상회담이 불발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사자인 임태희 전 장관은 실제와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임 전 장관은 2012년 10월 26일 <헤럴드경제>와의 전화 통화에서 "적어도 내가 북측과 접촉하는 동안 돈 얘기는 없었다"며 "김양건을 만난 이후 통일부와 통전부라인(통통라인)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손을 뗐는데, 혹 통일부와 통전부 실무접촉에서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 전 장관은 "북측은 당시 식량사정이 어렵다며 노무현 정부 때 수준의 식량지원을 거론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인도적 지원을 위해서라도 이산가족 문제와 국군포로, 납북자 송환 등 '프라이카우프'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북측도 이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임 전 장관은 2009년 11월 3차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비밀접촉 도중 김양건 부장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회담이 무산됐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 "김양건과의 접촉에서 의제와 시기, 장소 등은 거의 다 정리됐었지만 돈 얘기는 없었다"고 거듭 확인했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2011년 6월 북한이 "남북 비밀접촉 과정에 남측이 돈봉투를 건네려 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그해 6월1일 "5월9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남측의 김태효 대통령 대외전략비서관,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이 회담에 나섰다"고 공개하고, 남측이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자고 제안하면서 돈봉투를 내놨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북한의 일방적 주장"이라며 일축했지만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파문은 적지 않았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국내외 소식통에 따르면 2009년 11월 남북 비밀접촉이 무산된 이후에도 이명박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을 꾸준히 추진했다. 이 전 대통령이 2011년 8월 중앙아시아 3국 순방, 2012년 1월초 중국 국빈 방문, 5월 12~1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 나서는 과정에 측근들은 북측과 접촉했다는 후문이다. 2012년 9월 7~9일 이 대통령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가 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를 때도 측근들은 북측 관계자들과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남북 접촉에서, 특히 정상회담을 전제한 만남에서 북한이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약속한 대규모 북한지원, 즉 '북한판 마셜플랜' 이행이라고 했다.

김양건 부장은 2009년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한 북측 사절단으로 서울에 왔을 때 박지원 당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와의 면담에서, 그리고 이어진 23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접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한 '북한판 마셜플랜'에 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태희 전 장관과 통일부 측의 언급, 그리고 북한 소식통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비밀접촉이 김양건 부장의 5억∼6억 달러 요구 때문에 무산됐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MB회고록에서 북한이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명목으로 10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내용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들도 '금시초문'이라는 입장이다. 북한 고위층과도 인연이 있는 베이징의 북한소식통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현대그룹에서 북한에 건네진 돈이 100억달러 정도가 된다는 얘기는 있지만 북측이 정상회담 대가로 100억달러와 그밖의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고 전해왔다. 또 다른 대북소식통은 "북한은 2000년 정상회담과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한 막대한 대북지원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100억달러 제의' 얘기는 금시초문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김 전 대통령이 약속한 '북한판 마셜플랜'규모와 북측이 제의했다는 100억달러와는 너무 큰 격차가 있다"며 "북한이 진짜 원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밀약'이 이행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정상회담을 원했다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북측의 과도한'돈 요구'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이 틀어졌다는 MB회고록의 내용엔 의문 부호가 따른다.

MB회고록 재론될 여지 있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내용이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남북 접촉 비사가 공개된데다 그 내용이 예민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당시 중국 지도부의 역할과 발언을 그대로 공개한 것은 외교적 실수인데다 '결례'라는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정부의 남북관계 관련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MB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회고록 출간에 "현 정권을 위한 것" "박근혜 정부가 외교ㆍ안보를 잘 모르는 것 같다"등으로 각을 세워 박근혜정부를 자극했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MB정부는 대북 관계에서 '돈(경제적 지원'에서 당당했는데 박근혜정부는 그렇지 않고 물밑 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박근혜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희망(기대)'과 '경색'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MB회고록 중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비밀 접촉의 '진실'은 향후 발전적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MB회고록의 가치와 진실성도 제대로 평가될 여지가 있다.



박종진 기자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