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19일 일본행… 하루 만에 귀국 해프닝"개인적 일정으로 출국한… 도피성 출국 사실무근"박지원 "'성완종 리스트' 중 한 명… 의혹 살 수밖에"

'성완종 리스트'에이름이 오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일본에서 용무를 마친뒤 20일 오후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해 공항 건물을 나서고 있다.
지난 20일 정치권에선 한바탕 '김기춘 소동'이 일었다.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19일 오후 출국, 일본에 머물고 있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장 야권을 중심으로 '도피성 출국'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20일 국회 법제사법위 전체회의에서 김 전 실장이 일본에 가 있는 상황을 따지며 어떤 경로로 출국한 것인지 자료를 제출하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이 도마위에 오른 것은 그가 '성완종 리스트'의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이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사망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06년 9월 김 전 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은 "근거없는 얘기"라며 성 전 회장의 주장을 부인했다.

양측 주장의 진위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은 의심을 살 만했다. 김 전 실장은 일본으로 출국한 이유가 부인의 신병 치료 때문이라고 했지만 설득력이 없다는 게 중론이다.

김 전 실장 일본행의 수수께끼를 추적했다.

지난 20일 국회 법제사법위 전체회의.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게 김기춘 전 실장의 일본 출국을 따졌다.

"지금 현재 (성완종 리스트)8명 중 1명이 어제 출국, 현재 갖고 있는 휴대전화가 해외로밍돼 있다는 제보가 있다. 이 와중에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분이 출국했다면 더 큰 국민적 의혹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어 박 의원은 "전화기가 해외로밍 돼 있다면 이는 (출국 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분이 어떤 경로로 출국한 것인지 자료로 제출해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이에 황교안 법무장관은 "출국금지 관련은 개인 신상 문제이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자료를 말씀드릴 수 없다"며 "다만 필요한 조치를 필요한 때에 정확하게 하겠다"고 답변했다.

김 전 실장의 일본 출국이 논란을 빚자 김 전 실장은 하룻만에 급거 귀국했다. 김 전 실장 측은 20일 "부인의 신병 치료차 일본에 갔으며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던 일이다"며 항간의 의혹을 부인했다. 즉 '도피성 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한 김 전 실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 전 실장의 일본 출국은 우연하게 알려졌다. 김 전 실장과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이 제보했던 것.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19일 오후 12시 35분 김포발 일본 하네다(羽田)행 전일본공수(아나항공) 0854편을 타고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출국했다.

제보자는 "김 전 실장이 아나항공 탑승 게이트 앞에서 마일리지 회원을 먼저 태우기 위한 항공사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잠시 대기 줄 앞으로 나섰지만, 회원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비즈니스석 탑승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행기에 올랐다"고 전했다.

여러 정황상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은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은 면이 여럿 있다.

우선 일본행 시점이다. 최근 정국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휩싸인 상황이다. 국민은 리스트의 실체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고, 검찰 또한 리스트 명단에 오른 인사에 대한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 전 실장이 일본으로 출국한 것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고, 김 전 실장이 그것을 모를리 없는 터인데 출국을 감행했다.

일본행 이유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김 전 실장 측은 부인 신병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던 일'이어서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 부인의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루도 안돼 치료하고 올 정도의 병이라면 굳이 오해를 살 수 있는 예민한 시기에 출국했느냐 는 것이다. 일설에는 부인의 병 이 경미하지 않아 하룻만에 치료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부인 신병 치료차 일본을 방문했다는 것은 '변명'이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김 전 실장은 일본행이 '오래전부터 잡혀 있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제보자에 따르면 출국 당일 김 전 실장의 행동은 그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일본행이 급박하게 이뤄진 것처럼 서툴고 어색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국내선이 아닌 일본 항공기를 이용한 것도 뒷말이 나온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지만 출국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국내외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선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을 두고 다른 말이 나온다. 이들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은 부인의 병 치료와는 무관하며 '도피성 출국'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보 관계자들은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 금융 관계에서 중요 사안이 한국에서 집행되는 과정에 김 전 실장이 걸림돌이 될 수 있어 해외로 출국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국제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 김 전 실장이 청와대 실장으로 있으면서 국제금융과 관련해 큰 실수를 한 게 있는데 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김 전 실장이 국내에 있는 게 방해가 될 수 있어 모처에서 출국을 종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김 전 실장의 '큰 실수'에 대해선 함구했다. 단 '사욕私慾)'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에둘러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이 국가를 위해 활용돼야 할 금융 관련 부분을 개인적으로 욕심을 내 중대 사안이 틀어지거나 지체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김 전 실장이 물러난 '진짜 이유'도 '사욕'과 관련 있다고 했다.

한편, 김 전 실장이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출국한 것이 알려진 배경과 관련해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다. 현재는 우연히 김 전 실장과 동승한 한국인이 김 전 실장을 알아보고 국내에 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이 제보자를 통해 박지원 의원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얘기도 들린다. 박 의원이 20일 국회 법사위에서 김 전 실장의 일본행을 추궁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홍우 기자 lhw@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