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간부·해외 주재원 탈북·망명 잇따라… '김정은 체제' 최악

19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
김일성 시대 탈북·망명 드물어… 로열패밀리 이한영 망명 대표적
김정일 시대 '고난의 행군기' 탈북자 늘어… 황장엽 망명 충격 커
김정은 시대 공포정치로 간부들 이탈 줄이어… 윤태영, 돈 관리자 망명

북한 간부들의 탈북과 망명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김정은 체제에 불만이 있거나 폭압적 통치에 등을 돌린 북한 당(黨)·정(政)·군(軍) 간부들이 탈북하거나 해외에서 망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엔 북한의 고위 장성과 김정은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노동당 39호실 간부의 망명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북한까지 나서 우리 측의 망명 보도를 부인하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북한의 간부와 해외 근무자들 중에 탈북하거나 망명하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북 소식통들은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경제난과 국가 재정 악화로 공포정치가 자행되면서 간부들까지 북한을 떠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돈벌이'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 간부와 김정은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간부들이 숙청을 두려워해 탈북에 앞장서고 있다는 전언이다.

북한 간부들의 탈북 및 망명 러시는 이전 시대와는 다른 현상으로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과 이상징후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남북관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사안으로 향후 변화 추이가 주목된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를 거쳐 김정은 체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탈북과 망명이 있었지만 현재처럼 북한 내외에서 간부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북한 전문가들 중엔 김정은 체제의 한계, 심지어 붕괴 가능성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왼쪽 사진부터 고(故) 이한영, 강명도, 고(故) 이웅평, 고영환, 조명철
역대 북한 정권에서 일어난 간부, 또는 고위 인사의 탈북과 망명을 통해 북한 내부사정과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봤다.

김일성 시대…이한영·강명도·고영환 등 일부 고위층 탈북·망명

김일성 시대는 전반적으로 탈북자가 드물고, 간부들의 탈북이나 망명도 손꼽을 정도다. 북한 경제는 1960년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앞섰고, 1970년대 이후 남한에 뒤졌지만 김일성의 통치는 북한 전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김일성 시대 말기, 아들인 김정일 체제가 확고해지면서 이에 불안해진 세력과 권력 교체기 혼란한 상황에서 일부 고위층과 간부가 탈북하거나 망명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가 김정일 일가 로열패밀리인 이한영의 망명이다.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김정남의 모)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은 북한에서 호화생활을 즐겼으나 김정일-성혜림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이모 성혜림 및 어머니 성혜랑과 함께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이어 1982년 10월, 홀로 비행기편으로 귀순의사를 밝히고 한국에 망명했다. 이한영은 남한 여성과 결혼해 정착했으나 1997년 <김정일 로열 패밀리: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를 출간해 김정일의 사치 생활을 고발한 후 여러 차례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사살됐다.

북한 서열 3위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인 강명도는 1994년 5월 탈북했다. 김일성의 10촌이기도 한 강명도는 북한 상위 0.001%의 엘리트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 연구실장과 합영회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는 "1993년 중국 출장 도중, 어이없는 허위 보고로 인해 계획적인 망명자로 낙인 찍혔다. 김정일은 150명의 체포조를 파견해 죽여서라도 나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더라. 30여 년 동안 목숨 바쳐 충성한 대가가 고작 죽음뿐이라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고 한국에 망명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강명도는 1994년 탈북 후 현재 경민대학교 효충인성교육원의 안보ㆍ북한학 교수로 있으며 방송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북한 공군 대위 이웅평의 귀순도 큰 화제를 모았다. 이웅평은 1983년 훈련 도중 편대를 이탈해 한국에 귀순했다. 당시 이웅평은 "가끔 비행기 수신기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자유로운 한국생활을 동경하면서, 북한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귀순 사건으로 인해 남북한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았는데, 그해 5월 7일에는 북한군 제13사단 민경대 소속 신중철 상위가 휴전선을 넘어 귀순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됐다. 이웅평은 귀순 후 한국 공군에 몸담아 1996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공군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2002년 5월 간기능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최초의 외교관 탈북자도 있다. 콩고 대사관에서 근무한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다. 고영환은 1988년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과의 통역을 맡았으며 북한의 건축기념인 경축공연 때는 김일성을 가까이에서 보조한 인물이다. 그는 콩고주재 북한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해오다 감시를 맡은 국가 고위국 당원이 돈벌이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산 뒤 행동의 제약을 받아 1991년 망명했다. 한국으로 망명 후 대북 통일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에는 통일준비위원회(위원장 박근혜 대통령) 외교안보분과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최근까지도 언론에 모습을 비치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김정일 시대… 탈북자 늘어나, 황장엽 대표적

김일성 사후(1994년 7월 8일) 북한은 경제 불황에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기'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탈북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1999년에 100명, 2002년에 1,000명을 넘어섰다.

김정일 통치 기간(1994년 7월-2011년 12월)에 특히 탈북자들이 증가했는데 2010년 11월까지 2만명을 넘었고, 이후 매년 1,500명가량이 한국으로 입국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는 북한 고위층과 간부들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1953년 7월 남북이 휴전협정 이후 대치해온 이래 북한 최고위층 인사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이 김정일 시대에 일어났다.

황장엽은 김일성대 총장을 거쳐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장 등 여러 요직을 겸임하고,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의 망명은 '핵폭탄'급 사건이었다.

그는 수기를 통해 "조국(북한)의 체제에 의분(義憤)을 느껴 그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에 망명을 신청했다"고 전했지만 일부에선 김영삼 정부의 황장엽 망명 비밀 프로젝트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황장엽은 1997년 주체사상에 관한 강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직후에, 베이징에서 김덕홍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한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한국에 입국한 황장엽은 각종 강연을 통해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주장하였으나 이후 김대중 대통령시절에 진행된 햇볕정책의 영향으로 그의 주장은 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10년간 정부에 의해 활동제한조치를 당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해제됐다. 이후 사망할 때 까지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함께 김정일 정권 타도와 북한의 인권상황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2010년 북한에서 보낸 간첩의 암살이 미수 되기도 했고, 그해 10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일성대 교수로 재직하다 탈북한 조명철도 화제의 인물이다. 조명철은 고위층 자제 출신으로 행정부 간부 아버지로 인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며 김일성대에서 교수로 지냈다. 그는 자유를 박탈한 북한 사회와 김정일 정권에 염증을 느껴 탈북(1994년 7월 27일)했다고 밝혔다. 당시 그의 탈북은 북한 최고 엘리트의 귀순이라는 데서 주목받았다. 그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거쳐 통일교육원장을 지냈고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탈북자 1호'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홍순경은 탈북자 중 외교관 출신의 최고위급 인사에 속한다. 그는 1983년 파키스탄주재 북한대사관 서기관으로, 1991년 태국주재 북한대사관 무역참사, 과학기술참사(1급)로 근무했다. 어느 날 보위부에서 자신을 모함해 해하려는 것을 알고 탈북을 감행해 2000년 10월 가족 3명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2013년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에 임명돼 통일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 90년 중반 이후 귀순한 주요 탈북자로는 최주활 인민군 상좌, 차성근 잠비아대사관 보안책임자, 이철수 공군대위, 정갑렬 국가과학원 과학자 등이 있다.

김정은 시대…공포정치로 간부들 탈북·망명 잇따라

김정일이 사망(2011년 12월)한 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섰지만 북한은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장성택의 북한은 '경제'를 중시하며 개혁개방의 시도와 함께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다. 장성택이 건재할 당시 북한 체제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장성택이 2013년 12월 처형된 이후 북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통치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성택 숙청에 대해 이웃한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전 세계가 북한에 등을 돌리면서 김정은 체제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특히 경제난과 식량난이 겹치면서 북한 주민의 불만이 폭증하고 이탈이 급증했다.

김정은 체제를 뒷받침할 '돈'이 고갈되면서 이를 마련하기 위한 김정은의 압박이 도를 넘고,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 간부들에 대한 숙청이 잇따르면서 당ㆍ정ㆍ군 간부들이 동요했다. 김정은의 책임 추궁이 공포정치로 이어지면서 적잖은 간부들이 탈북하거나 망명하는 사태가 빈발해졌다. 특히 '돈벌이'와 관련된 부서의 간부들이 책임 추궁에 따른 숙청을 우려해 탈북에 앞장섰다. 해외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간부들의 망명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8월 북한 조선대성은행 수석대표 윤태영의 망명은 대표적인 예다. 윤태영은 북한의 비자금을 맡겨 둔 러시아 6개 지점 은행의 한 지점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김정은은 비밀 통치자금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해외 자금 실적이 떨어지자 해외 주재 금융 담당자들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그들에 대한 책임 추궁과 함께 담당자를 교체하기 위한 조치였다. 윤태영 망명사건은 그러한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다. 윤태영은 북한 비자금을 갖고 잠적해 제3국으로 망명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올해 들어 북한 간부와 외화벌이 일꾼의 탈북과 망명이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국내에선 김정은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소속 간부 3명과 인민군 고위 간부가 망명해 입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따르면 박승원 인민군 상장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박승원은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북측 차석대표로 참석했던 고위 간부로 지난해 마식령 스키장 건설에 큰 공을 세웠다며 북한 정부로부터 노력영웅 칭호와 금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이 숙청되는 등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지난 4월 탈북을 감행했고, 한국 정부가 그의 신병을 인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물론, 북한도 박승원의 망명사실을 부인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통치에 반발하거나 숙청의 두려움 때문에 탈북하거나 망명하는 북한 간부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로 전해진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 체제 이전엔 주로 일반 주민이 탈북했는데 김정은이 통치를 잘못하면서 간부들까지 탈북 행렬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김정은 체제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더 많은 간부와 해외 주재원들이 북한을 떠날 것으로 관측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간부들의 이탈로 김정은 체제가 곧바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하지만 일부에선 공포정치의 악순환이 반복되면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 탈북자 北 통치 시기 따라 변화

90년대 중반부터 늘기 시작…2010년 말 2만명 넘어

2010년 이후 매년 1,500여 명 입국…여성 70% 차지

탈북자는 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 사정 악화를 계기로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100명, 2002년에 1,000명을 넘어섰다. 1998년도까지 국내 입국자는 947명에 불과했으나 지속해서 증가해 이후 3년간 1,043명이 입국했다.

2000년대 이후 김정일 통치기에는 2010년 11월에 2만 명을 넘어섰다. 탈북자의 국내입국 추세는 2005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추세를 유지해 2010년에는 2,400명으로 다소 감소했으나 2012년 이후부터 연간 1,500여 명이 입국하는 추세를 보인다. 탈북자들이 평균 4~5년의 해외체류 중 북송위험 등의 정착에 한계를 느끼며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입국하려는 시도가 증대했다.

여성의 입국비율은 1998년 이전에는 7%에 불과했으나 1997년 35%, 2000년 42% 등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김정일 통치기에는 2012년 72%, 2013년 76%, 2014년 78% 등으로 다시 상승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 비율을 넘어서 현재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 국내입국 탈북자 수는 2011년 2,706명에서 2014년 1,396명으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남성 탈북자 수는 795명에서 305명으로 줄었지만, 여성 탈북자 수는 1,911명에서 1,092명으로 주는 데 그쳤다.

여성 탈북자의 경우 중국을 거쳐 탈북하는 과정에서 가사도우미 등 신분 노출에 위험이 크지 않은 직종을 선택해 강제송환되지 않고 탈북비용을 모을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홍우 기자 lhw@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