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전쟁 발발' 극비 보고서… 당시 한반도 긴박한 정세 드러나6·25 둘러싼 첩보전 북한 대남첩보국 정체 드러내'첩보전의 천재' 한국전쟁 당시 북한 첩자 직접 총살북파공작원의 아버지 '007 같은 활약상'도 기록돼

8ㆍ15 광복절을 앞두고 해방 직전ㆍ후 한반도 정세와 한ㆍ미ㆍ중ㆍ소의 현재 과거 관계 등이 다각도로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광복 직후인 1947년부터 1953년 7월 27일 6ㆍ25전쟁 휴전 때까지 한반도를 누비며 전쟁지도를 움직인 '전쟁의 달인'이 그 정체를 드러내 관심을 끈다.

6ㆍ25 직전 한반도의 긴박한 정세를 움직인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ls 1927~1992)가 바로 그 전설적 인물이다. 도널드는 6ㆍ25 전쟁이 발발하기 수개월 전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전쟁 발발'이라고 정확히 보고한 인물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아는 이가 드물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한반도와 주변국 정세에 대해 정보수집활동을 해온 베테랑 첩보원이며, 6ㆍ25전쟁 시 비밀첩보부대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 그와 첩보활동을 한 한국인 첩보원들 중에는 아직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도 있다.

그동안 니콜스의 존재나 활동내용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심지어 그가 노년에 회고록을 냈지만 미국 CIA(중앙정보국)는 이를 모두 수거해 폐기처분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민감한 내용과 기밀사항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재 그의 회고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주간한국>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끝에 복사본 등으로 남겨져 있는 니콜스 회고록 초고를 입수했다. 그동안 니콜스에 대한 보도는 일부 나오기도 했지만 짧게 언급되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의 회고록 내용 공개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북공작 최고 기밀 보고서

니콜스는 19세 때인 1946년 미(美)방첩대(CIC) 훈련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 도쿄[東京] 주재 극동공군사령부의 607CIC 파견대 산하 'K분견대' 특별요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그의 임무는 육군 ·항공대 요원과 시설에 대한 전복행위의 예방과 비밀취급 허가가 필요한 한국인 및 미국인의 배후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그는 특히 인문정보(Humint:Human Intelligence)에 실력을 발휘했다. 인맥(人脈) 즉, 휴민트를 활용해 남한 좌익세력과 북한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정확한 정보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니콜스는 휴민트의 현지 정보를 바탕으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김삼룡(金三龍)을 체포, 남한 좌익세력의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공군과 육군, 한국인과 미국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美 공군 제6006항공첩보부대)를 이끌고 6ㆍ·25전쟁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T-34 탱크의 취약한 부분을 파악, 이를 파괴하는 데 기여한 점과 미그-15기의 성능을 파악함으로써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7년 서울을 떠난 후 퇴역하여 플로리다에 은거하다가 1987년 다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미극동 제5공군사령관 패트리지 장군은 그를 '전쟁의 달인' '정보의 천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니콜스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미 군부 핵심인사들은 그를 '전설적인 전쟁영웅'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명장으로 유명한 미 극동 제5공군 사령관 패트리지(E.E Partridge) 장군은 "내 생애 내가 본 최고의 군인을 추천하라면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도널드 니콜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확언하기도 했다.

그는 니콜스를 '정보의 천재'라고 극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미 정보국의 그레고리는 "도널드 니콜스는 한국전쟁 당시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한국의 로렌스'"라고 말했다.

니콜스는 한국에서 한국 부하들이 '네코'라고 불렀다. 니콜스를 줄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가 이끈 첩보부대가 그 유명한 '네코부대'다. 최근 한 언론사에 네코부대의 활약상을 조명한 바 있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니콜스는 한국전쟁 직전 한국과 미국인으로 혼재된 특수부대를 이끌며 북한의 1950년 6월 25일 남침 계획을 입수 정확하게 보고했다. 그의 활동은 미공군 정보학교의 교재에 정보활동의 모범으로 소개될 정도다. 언론, 출판, 영화, TV방송사 등에서 그의 활약상을 조명하기 위해 그에게 제안하였으나 니콜스는 모두 거절했다.

대신 그는 말년에 외부인과의 접촉을 줄이고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의 회고록은 군 정보기관과 패트리지 장군의 허가와 감독 아래 집필됐다. 집필 당시 기밀 사항 때문에 지명, 인명 등 모든 것을 생략했으나 사실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북한이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1948년 말부터다. 북한은 이때부터 니콜스를 '천의 얼굴'이라 부르며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살하려 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전부터 니콜스는 끊임없이 암살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당시 미국 정보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북한 대남공작국은 그에 의해 남로당지도부가 붕괴된 것에 분노해 니콜스 잡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북한은 니콜스가 휴민트(humint: 민간인 등 공작ㆍ첩보인력)의 귀재라고 판단해 그의 손에 정보가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남로당 사건 공판기록에 의하면 니콜스는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고문의 자격으로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남로당의 안영달, 조용복 등을 조종해 남로당과 서울지도부의 책임자 김삼룡을 체포했다. 또 이들을 다시 입북시켜 북한지역의 인민군 항공부대에 관한 군사기밀을 비롯해 조선노동당 내부 실정에 관한 기밀 자료를 빼냈다.

미국, 중국, 소련의 비밀대화

니콜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수준높은 정치인들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포'였다. 그는 회고록에 "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극비 사항이 있으며 그것을 알면 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는 순수한 우정이나 도덕적 매력에 의해 설득될 수 없었던 정치인 등 관료들에게 기밀정보를 통한 '공포'를 사용했다.

니콜스가 남한의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데 가장 중요한 근간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다. 1946년 가을 이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난 니콜스는 이 전 대통령을 통해 정치권 정보를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심지어 니콜스는 이같은 정보활동을 통해 미국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1949년 선거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다.

니콜스는 첩보수집 과정에서 적을 고문하기도 했다. 의자에 앉힌 채 물고문, 겨울철 얼음이 어는 추운 날씨에 물속에 빠뜨리거나, 특정부위를 불로 지지는 등의 고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전쟁에 대한 첩보수집 과정은 초대형 스케일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니콜스는 EEI(Essential Elements of information)를 수집하라는 극동공군(FEAF)의 지시에 따라 요원들을 훈련시켜 북으로 파견했다.

니콜스는 먼저 반공 청년활용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청년들로 구성된 민주청년동맹의 요원들을 훈련해 파견했다. 이 중에는 이중 스파이인 공산주의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제거되거나 역할에 어울리는 특별한 활동에 배치됐다.

북한에 파견된 요원들 중 몇몇은 여자들이었다. 이들은 식당에서 일하며 니콜스가 북으로 파견한 요원들과 접선했다. 그들은 여자들에게 귀금속 등을 주며 정보와 교환했다.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북한에는 8개의 비행장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니콜스 부대는 1949년 말까지 북한의 요원망을 통해 북한지역 비행장이 62개나 되며 그 청사진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위치와 강점ㆍ약점을 보여주는 문서도 일부 입수했다. 그 문서는 김일성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일급 기밀이었다.

또 니콜스는 중국 대련과 광둥반도의 비행장과 탱크 공장을 보여주는 정보도 입수했고 소련 극동공군의 본산지인 치타와 하바로브스크까지 정보원을 파견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또 네코부대는 북한 전력의 핵심이던 옛 소련제 T-34 탱크와 미그(MIG)-15 전투기의 정보를 파악한 것이다. 네코부대는 북한 적진에 직접 침투해 T-34 탱크 장갑판 해치와 기밀문서, 미그-15의 엔진과 통신 관련 핵심 부품을 빼앗아 왔다.

니콜스의 세 번째 보고서에는 "6월 25일에서 28일 사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중국 소련 등이 대대적인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워싱턴과 동경은 니콜스의 보고를 무시했고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아 '재앙'을 초래했다.

네코부대는 6ㆍ25전쟁이 끝난 뒤 1957년까지도 유지됐다. 미 육군 소속의 북한 지역 출신 한국인으로 구성된 '8240유격백마부대(켈로부대)'의 일부 부대원들은 종전 후 부대가 해체된 뒤 네코부대로 편입되기도 했다.



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