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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활약 1세대 북파공작원 김인호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강제노동·고문·처절한 굶주림 등 北 수용소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김 선생 "가장 끔찍한 건 나의 고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김일성이 피로 이룬 북한 광란의 대학살극 수시로 발생
김인호 선생은 1926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했다. 그는 6ㆍ25가 발발하기 전 주한 미공군첩보국의 도널드 니콜스 사령관이 심은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북한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김 선생은 한국전쟁기간 동안 지옥같은 참상을 생생히 목격한 참전군인이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회고록 '릉라도 여관'이라는 원고를 집필했다. 이 책은 보안상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아직 정식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90세를 넘긴 고령의 그가 써내려간 원고를 살펴보면 당시의 아수라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김 선생과 이응용, 김병기, 이응주 등은 유엔군이 북진하던 때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났다. 1951년 2월부터 이들은 서평양 대동강 부벽루 근처에 있던 여관에 숨어 있다가 남하했다. 이 여관 앞에는 버드나무가 우거진 능라도가 보인다. 김 선생은 그 때 본 능라도를 잊지 못해 자신의 원고 가제를 '릉라도 여관'이라고 지었다.

그의 외사촌 강창옥은 니콜스가 1947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든 휴민트였다. 강창옥(여)과 최명신(여)이라는 인물은 능라도여관을 통해 니콜스에게 북한 첩보를 전달하고 김 선생 등 일행의 북한 탈출을 도왔다. 강창옥 최명신은 이들 탈출 직후 북한 당국에 꼬리를 잡혀 총살당했다. 김 선생의 파란만장한 공작원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한에 두 번은 속지 마라

이태원 그의 자택 부근에서 만난 김 선생은 90의 고령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장수 비결에 대해 김 선생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오래 살아.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하라는 것 충실히 따르고 살았다. 그게 장수비결"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원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선생은 격앙되거나 슬퍼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당시의 기억을 풀어냈는데, 오히려 달관한 듯한 그 모습이 더 강한 전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 선생은 "전쟁시기를 거쳐 생존해 나와 함께 지냈던 모든 이들이 다 늙어 죽고 이제 나만 남았다"며 "나는 김일성을 가까이서 자주 봤다. 지금 김정은은 자기 할아버지를 쏙 빼다 닮았다. 정적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수법도 제 할아버지 모습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한국전쟁 전 반 김일성과 소련을 규탄하는 조양단을 조직해 삐라를 뿌렸다가 내부서에 체포됐다. 평양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평양교화서, 본궁노무자수용소, 흥남노무자교화소에서 3년을 살았다. 6ㆍ25 전쟁 중 국군의 도움으로 석방돼 평양 능라도여관 지하 아지트에 숨어있다가 남하해 정보원으로 군 생활을 마쳤다.

당시 미 공군정보대 도널드 니콜스 소령의 명령에 따라 남하한지 두 달 만에 다시 북으로 들어가 국군 포로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김 선생은 "김일성은 지금도 살아있다. 그는 유훈으로 북한을 사후에도 통치하고 있는 전무후무한 인물"이라며 "김일성은 지도자라기보다 종교집단의 교주같은 자"라고 정의했다.

또 김 선생은 "김일성과 그 뒤를 추종하는 이들은 셰익스피어가 다시 태어나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학한 무리들"이라고 말했다.

김 선생은 최근 자신의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그 배경에 대해 김 선생은 "전쟁의 참화를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겪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30여년 전에 썼던 것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며 "책에서 미처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은 녹음기를 통해 기록해 뒀다. 누군가 내가 남긴 역사의 기록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 생이 다하기 전에 최대한 기억을 짜냈다. 분량은 아마 100시간이 넘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대해 김 선생은 "미국과 소련 중공은 전쟁 전부터 첩보전으로 상대방의 작전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다"며 "미국 트루먼 대통령,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이 바로 그 주역들"이라고 말했다.

6ㆍ25의 실체는 '총성없는 전쟁'

백의사(白衣社) 조직의 일원으로 1947년 2월 4일 평양역 관장에서 열린 3ㆍ1절 행사에 수류탄을 던진 이성열 선생은 평양을 방문해 능라도 여관을 찾곤 했다.

'백의사'란 한국 해방 이후 미군정기 시기에 있었던 정치 테러 극우단체다. 1945년 11월경에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당시 김 선생의 모친은 능라도에서 여관을 운영했는데, 어머니는 백의사 조직원이 여관을 찾으면 숙박비도 받지 않았고 이들이 돌아갈 때 여비를 챙겨주기도 했다. 김 선생은 백의사가 김일성을 암살하려던 현장에 있었다. 비록 김일성을 제거하는데 실패했지만 백의사는 용감했다. 바로 백의사를 지휘한 인물이 니콜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김 선생의 집 능라도여관은 대동강 을밀대와 부벽루, 능라도가 보이는 수려한 곳에 있었다. 1946년 니콜스가 능라도여관을 북한 휴민트와 연결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김 선생의 아버지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영하던 능라도 여관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니콜스 정보사령부의 모태가 되는 곳이었다. 여기서 니콜스와 긴밀하게 연결된 여성 휴민트 강창옥과 김일성 의과대학 학생이 있었다.

김 선생은 "이들 휴민트 대부분은 전쟁 직후 적발돼 대부분 총살당했다. 니콜스에 협조한 대가로 총살된 휴민트 중에는 나의 친인척도 포함돼 있다"며 "북한은 남한에 조금이라도 협조한 흔적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다 총살하거나 잔인하게 고문한 뒤 죽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종교를 금지하는 김일성에 저항하다 순교한 김화식 목사와 김진수 목사의 죽음도 목격했다.

김화식 목사는 평양교화소에서 김진수 목사는 흥남교화소에서 순교했다. 두 목사의 순교 시차는 3년 정도였다. 결사반동죄로 수감된 김 선생의 방은 김화식 목사의 건너편 감방이었다. 김진수 목사와 김 선생은 흥남비료광장에서 노역을 함께했다.

김화식 목사는 김일성 우상화정책에 반대하는 단식투쟁을 하다 숨졌다. 김화식 목사는 '가고파', '목련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생의 선친이다.

김진수 목사는 흥남교화소에 수감돼 비료공장에서 사역을 하면서 친해졌다. 김 선생은 김진수 목사가 총살로 생을 마감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김 선생은 김진수 목사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 흥남시 덕리라는 곳에 안장했는데, 지금 그 흔적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진수 목사의 부인은 남편이 수감된 감옥 근처에 방을 얻어놓고 옥바라지를 했다.

김 선생은 "지금도 흥남교화소가 보이는 언덕에서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하염없이 바라보던 김진수 목사 부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지금은 두 분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악취나는 시체산이 곳곳에

국군이 북진을 시작하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국군 2진으로 특무사업을 담당하는 방첩부대(CIC) 3지구대가 흥남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공백기간 동안 자치대의 활동과 실적을 보고받고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방첩부대 공병익 대장은 김 선생을 포함해 김병기, 김동국, 이응용, 조치호 등 다섯명을 방첩대에 현지 입대시켜 자치대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3주만에 이뤄진 일이라 김 선생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은 6ㆍ25 당시 우리 국군의 부패와 기강해이가 사실 알려진 것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지금 우리 군의 방산비리에 전ㆍ현역 장교 장성들이 연루된 것을 보면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김 선생은 비판했다.

김 선생은 "흥남의 5대 공장 중에는 수은공장과 인조보석 공장이 있었는데, 시설경비와 함게 생산품 경비를 하는 과정에서 촌극이 일어났다. 자치경기비대가 국군의 약탈을 경비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국군 가운데 일부가 경비를 서는 치안대원을 위협해 수은이며 보석을 강탈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군수물품을 몰래 빼돌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특무부대가 개입해 막기는 했지만 당시 국군을 믿고 있던 양민들은 국군에 크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또 김 선생은 북한 내 감옥의 시체 발굴과 북한의 전쟁범죄 진상조사 업무도 했는데, 수용소 등 감옥을 조사할 때 그 기억은 실로 지옥과 다름 없었다. 수용소는 북한이 후퇴하면서 사살한 사람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김 선생은 "미군이 지급한 마스크를 쓰고 일하긴 했지만 시체에서 나는 악취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며 "함흥교화소에서 일어난 학살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곳곳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즐비했고 100여개가 넘는 방들에는 모두 시체가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또 김 선생은 "교화소 밖 화장실 안에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오물통 안에도 도끼에 머리가 찍혀 두개골이 파손된 시체들이 오물 속에 쳐박혀 있었다"며 "이런 잔학한 만행을 북한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했다. 일본군도 이렇게 잔인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같은 민족끼리 더 잔인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치가 떨렸다"고 말했다.

김 선생에 따르면 시체 발굴작업은 괴뢰군 잔당과 악질부역자들에게도 시켰는데, 이들도 사람인지라 끔찍한 광경에 소나기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시신을 수습했다.

이어 "가족들의 시신을 찾으러 왔던 사람들과 구경꾼들도 경악해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김 선생은 말했다.

북한의 학살 밤마다 악몽

이 발굴에서 한 교화소에서는 세 개의 우물에서만 여학생의 시체 1,000여구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함흥교화소 서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50~70미터 정도되는 석굴 10여개에서 시체가 다량 발굴됐다. 이들 석굴 입구는 다량의 돌더미로 막혀 있었는데, 이를 제거하고 들어가보니 시체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 석굴에서 나온 시신은 무려 1만5,000여구에 달했다는 게 김 선생의 설명이다.

김 선생은 "당시 주민들의 증언을 취합해 보니 인민군의 후퇴가 시작되자 매일 어디선가 인민군 트럭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실어날랐고 이때마다 커다란 폭음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즉, 인민군은 사람들을 석굴에 몰아넣고 폭약을 터뜨려 학살한 뒤 다이너마이트로 석굴입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김 선생은 더 충격적인 사실도 증언했다. 인민군들이 교화소에서 수용자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생화학폭탄 개발을 위한 생체실험이라는 게 김 선생의 설명이다.

시체발굴단을 조직해 수만구의 시신을 발굴하던 어느날 주민신고가 들어왔다. 흥남교화소에서 실험실이라고 쓰여진 나무간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김 선생이 가서 조사해보니 송판에 한자로 써 있었는데, 오래된 간판 같았다는 것이다.

김 선생이 간판이 발견된 주변을 살펴보니 실험실로 보이는 장소가 발견됐고 그 주변에서는 잡풀이 무성했다. 문은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출입했던 흔적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조사해본 김 선생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은 흥남교화소에서 생체실험실과 미생물무기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선생에 따르면 북한은 일본의 생체실험 도구를 그대로 이용해 생체실험을 했는데, 당시 김일성 의대 학생들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생체실험동의서도 발견됐는데, 그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병추, 본인은 김일성 수령 동지와 인민의 행복을 위해 이 몸을 기꺼이 생체실험의 제물로 바친다. 나는 내 몸을 생체실험에 바쳐 김일성 수령과 인민에게 내 죄를 속죄하고자 한다. 단기 4281년"

끝으로 김 선생은 우리 정부에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김 선생은 "전쟁을 멈춘지 60년이 넘도록 우리는 방치됐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야 우리에 대한 보상문제가 논의됐다"며 "그러나 김대중 정권을 약속만 해 놓고 끝내 이행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는 법을 제정하고도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김 선생은 "나는 한국인으로 미 공군에서 첩보원으로 근무했다. 내 조국은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미군소속이라는 이유로 보상을 못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라며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운 우리의 피를 알아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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