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충분… '종전선언’ 통해 경제인력으로 北 경제 활로 모색
무산된 김정은 답방 새해 이뤄지나
올 한해 최대 관심사가 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1일 “(김 위원장 답방은) 연내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어서 어려워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질 것”이라며 “남북 간 여러 가지 협의들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 간에 합의한) 날짜에 맞춰서 답방이 이행이 안 됐으나 그것이 큰 합의의 기본 틀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며 “김 위원장 답방도 평양공동선언에는 ‘가까운 시일 내에’라고 돼 있다.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청와대가 학수고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방한이 처음 거론된 것은 4월 27일 문재인 정부의 첫 남북정상회담 때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기적 회담’이 명시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판문점 선언)에 서명하면서 남북 정상의 정례적 만남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판문점 선언문에는 ‘문 대통령이 올해 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청와대와 여권은 문 대통령이 가을에 북한을 방문한다면, 다음에는 이에 대한 답방 형태로 김 위원장이 서울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9월 18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가시권에 들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더욱이 김 위원장이 19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 근교의 백화원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한 공동 언론발표에서 서울 방문 얘기를 꺼내 답방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였다.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해 나가기로 확약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까운 시일 안에 서울을 방문할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와 ‘경제제재 해제’를 놓고 충돌하면서 남북관계와 김 위원장의 방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남북관계는 미국의 입김으로 틀어지거나 지체되기 일쑤였고, 김 위원장의 답방에 필요한 남북 접촉은 진전되질 못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우리민족끼리”에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면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가능성도 멀어졌다.
<주간한국>은 지난달 말 김 위원장의 답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김정은 연내 서울 답방 못한다” 배경은’ 제하의 기사(12월 2일자, 제2755호)에서 자세하게 다뤘다. 본지는 김 위원장의 답방이 어려운 이유로 크게 △답방 대가 부재 △북한 노동당의 반대 △미국의 부정적 입장 등을 꼽았고, 경호의 시간적 한계와 남한의 반김정은 여론도 걸림돌이 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김 위원장의 올해 답방은 물 건너갔고, 신년 방한 여부도 유동적이다.
김정은 방한의 최대 목적은 北 경제난 해결…‘종전선언’ 결행
김정은 위원장의 방한을 놓고 북한 내부, 정확히는 노동당에서 막판까지 격론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11월 말쯤 “남한과 ‘민족의 약속’인 만큼, 얻는 것이 없더라도 방문해야 한다는 측과 아무런 성과가 없는 답방은 무의미하다며 반대하는 측 간에 논쟁이 있었고, 반대파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전해왔다.
소식통은 ‘성과’와 관련해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그는 “김정은이 남한에 가게 되면 ‘종전선언’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 대비해 동원하고 있는 병력을 ‘경제일꾼’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 답방의 최대 목적은 북한의 경제난을 타개하는 것이고, ‘종전선언’은 북한에서 경제인력을 늘릴 수 있는 최고의 방책인 셈이다.
실제 4ㆍ27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휴전선 일대의 병력을 과감히 줄여 경제일꾼으로 전환시켰다. 이들은 북한내는 물론,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지역으로 나가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6년 5월 당 대회에서 '핵ㆍ경제 병진' 논선을 천명한 이래 핵ㆍ미사일에 상당한 진전을 이룬 만큼 재래식 병력을 '경제일꾼'으로 전환해왔다. 군위 위상은 김정일 시대에 비해 크게 추락했고, 노동당이 전권을 쥐는 상황이 됐다. 노동당은 군 병력을 축소하면서 이들을 경제인력으로 확대해갔다.
현재 북한은 지난 5월 김정은 위원장이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2차 북중정상회담을 갖고 쌀ㆍ옥수수를 지원받아 식량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있다. 내년 1월이 지나면 식량도 바닥을 드러낼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김 위원장을 포함해 노동당의 최대 현안은 ‘먹는 문제 해결’이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궁극적으로는 북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거나 경제인력을 확장하는 게 급선무다. 김 위원장이 답방에서 추진하려는 ‘종전선언’과 남한으로부터 지원받으려고 하는 ‘대가’ 모두 식량난에 따른 기아문제와 총체적인 북한의 경제 문제를 풀기 위한 셈이다.
그러나 ‘종전선언’과 ‘대가’는 문재인 정부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기엔 엄청난 부담이 있는 사안이다. 유엔의 대북 제재가 엄존하고, 미국이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우리민족끼리’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가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있다.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과 대북 지원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한 결단을 한다면 김정은이 서울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말한다.소식통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행보를 비롯해 북한의 주요 사안을 최종 결정하는 노동당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을 의식해 독자적인 결정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김 위원장의 답방을 막았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과도하게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트럼프 정부에 정통한 미국 정보 관계자는 “평양에서 열린 9ㆍ18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남한과 북한이 ‘무리수’를 둔 것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얘길 들었다”며 “트럼프 정부는 북한은 물론, 문재인 정부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는 데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미국의 압박도 작용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정은 답방, 노동당ㆍ문재인 정부에 달려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 정부나 미국이 그동안 몰랐거나 간과해온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북한 노동당의 존재다.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인사나, 소위 북한 전문가 중 상당수는 북한을 김정은 위원장이 지배하는 나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북한의 방향과 운명까지 결정하는 주체는 노동당이다. 김 위원장은 노동당의 힘 있는 일원이고 북한을 대표할 뿐이다.
북한은 중국과 더불어 당(黨)이 국가보다 먼저 세워진 곳이고, 북한의 노동당과 중국의 공산당은 국가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다. 두 나라의 군이 국군(國軍)이 아닌 당군(黨軍)인 이유다.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노동당에 숙청 바람이 불어도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북한의 현실”이라며 “앞으로 노동당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전해왔다. 그는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을 당장 해결하기 위해선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진영과 그래도 같은 민족인 남한과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진영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며 “어떤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 김정은의 답방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입장 역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다. 최근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에 끌려다니며 주체적인 결단을 못한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지난 26일 판문역에서 열린 ‘동ㆍ서해선 남북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김윤혁 북한 철도성 부상은 “남의 눈치를 보며 휘청거려서는 어느 때 가서도 민족이 원하는 통일연방을 실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남 철도ㆍ도로 협력의 동력도 민족 내부에 있고 전진속도도 우리 민족의 의지와 시간표에 달려 있다” 고 밝혔다.
김윤혁 부상의 발언은 사실상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북한의 속내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북한이 가장 바라는 ‘경제’와 관련해 어떤 행보를 취하느냐에 따라 김 위원장의 답방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장백산 해외동포지원사업단 이사장은 “북한에 당장 시급한 것은 주민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라며 “동포애 차원에서 5ㆍ24 조치를 풀어 남한의 생필품을 북한 주민에 전하고 북한의 풍부한 임산물 등을 받는 물물교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면 유엔 제재에도 걸리지 않아 남북이 공생ㆍ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 답방 3ㆍ1절이 최적… ‘변수’ 남아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관련해 최대 관심사는 ‘시기’다. 청와대와 여권에선 12월 답방이 무산된 만큼 빠른 시기인 새해 1월이면 “최상”이라고 기대를 나타낸다.
정부 일각과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과 미국의 2차 북미정상회담이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2차 북미정상회담 일정에 따라 김 위원장의 답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이 내년 초 열리길 기대한다”며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2차 북미정상회담이 2월 전후가 될 것이고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그때와 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북한 사정에 정통한 베이징 소식통이나 장백산 이사장은 “폼페이오의 발언은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이고, 2차 북미정상회담은 전적으로 북한에 달렸다”고 말한다.
이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은 북미정상회담과 무관하고 문재인 정부 입장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장백산 이사장은 “굳이 답방 일정을 꼽는다면 북한도 명분이 있는 3ㆍ1절 때가 적합하다”고 말했다. 북한이 체제의 정통성을 항일무장투쟁에 두기 때문에 3ㆍ1절이나 8ㆍ15 광복절이 부합하지만 시급한 식량난과 경제 사정상 3ㆍ1절이 우선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3ㆍ1절 답방 가능성도 북한 노동당의 행보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입장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박종진 기자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