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중퇴 청소부에서 국회의원으로…
김규환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으면”

김규환 자유한국당 의원이 10월 29일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조은정 기자

김규환 자유한국당 의원은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중퇴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21살이 되던 해, 여느 날처럼 퇴근 후 귀가했지만 집의 분위기는 여느 날과 달랐다. 여동생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숨은 이미 멎은 상태였다. 김 의원은 고인을 붙들고 울었다. 어머니 약값을 벌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삶의 아무런 목적도, 보람도 없어져 버렸다.

자살 기도까지 했던 가난한 소년은 훗날 국가기술명장, 인제대학교 석좌교수가 됐다. 그가 입사한 대우중공업 오너일가의 지원사격도 있었다. 그리고 결국 지난 2016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6번을 받고 국회에 입성했다. 김 의원은 당시를 회상하며 “늘 어머니께 기도하고 어머니 꿈을 꾼다”고 말했다. 고인이 된 어머니는 여전히 그가 살아가는 버팀목이자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
“아니다. 2015년에 이한구 공천심사위원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왜 내가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지 자세히 적었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신청서를 다시 넣자 비례대표 6번을 받았다. 어떤 법안을 만들고 싶은지 작성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고 들었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 건 이런 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법이 생기고 나면 의원직에서 물러나도 된다.”

-법안에 대해 설명해 달라.
“발명 분야에 청년 명장을 만들기 위한 법안이다. 명장 육성을 위해선 교육, 연구, 취업 등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할 영역이 많다. 유치원 때부터 발명 교육을 시작하는 발명교육활성화지원법안은 필수적이다. 한국마이스터 전문대학원, R&D 센터 등을 창원이나 대구, 구미 쪽에 설립하는 방안도 제안하고 있다. 특히 스케일을 넓히기 위해 세계발명대전 관련 법도 구상 중이다. 노벨상보다 상금을 높게 매겨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다.”

-통과가 됐는가.
“법안이 통과되려면 7개 부처가 합의를 봐야 한다. 법안 통과를 위해 새벽 5시 반쯤 국회 근처 목욕탕에 가서 국회의원들 여야 할 것 없이 등을 밀었다. 통과된 법안 중 ‘발명교육활성화지원법안’은 제정안임에도 약 6개월만에 의결됐다. 덕분에 ‘때밀이 국회의원’으로 통하고 있다. 목욕탕 안에서처럼 국회에서도 여야가 없었으면 좋겠다.”

-막상 정치권에 와보니 어떤가.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보는가.
“행정부와 입법부가 철저하게 분리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국회에 다양성이 없다. 내년 총선에서 청년 리더를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청년 공천으로 최소 10석을 남겨줘야 한다고 본다.”

-초등학교 중퇴인데 교수가 됐다. 어떻게 독학했나.
“대우중공업에서 일하던 시절 형님들이 한글을 가르쳐줬다. 내가 간판을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른다. 삼국지를 37번이나 봤다. 최후의 승자인 사마의의 스토리를 자꾸 보게 됐다. 통일을 시킨 사람은 사마의였지 제갈공명, 유비, 관우는 아니었다. 사마의에게서 배운 것은 ‘두 번 뒤에 있는 생각은 반드시 감춰라’는 교훈이다. 승리를 위한 기본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행선지로 대구 동구 을을 선택했다. 그곳은 유승민 의원의 텃밭으로 유명한데.
“창원에는 이미 한국폴리텍7대학이 있다. 이를 발명 전문 대학으로 전환시키면 된다. 하지만 대구에는 발명과 관련한 교육·연구기관이 없다. 발명 R&D 센터를 대구에 설립하고 발전시킬 계획으로 대구 동구 을 당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가 아니어도 되지 않나?) 개인적으로 전주, 해남은 예술 분야에서 강하다고 본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대구를 택했다. 그리고 젊었을 때 대구에서 국제기능올림픽을 나간 적이 있었다. 당시 사고를 당했을 때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대구는 내게 의미가 깊다.”

-유승민 의원과의 승부에서 승산이 있나.
“현재 여론조사에서 내가 불리하지 않다. 당협위원장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지역구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여론조사 결과는 노코멘트하겠다.”

-지금까지 잘 됐기 때문에 긍정하시는 것 아닌가.
“내 별명이 '걱정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걱정말라"고 말하는 습관 때문이다. 대우중공업에 다닐 때 사장님이 무슨 얘기를 해도 내가 걱정 마시라고 했다. 청년들도 몇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성공이란 한 순간에 찾아오는 게 아니다. 내가 자란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달라 청년들에게 무작정 개인의 노력만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

노유선 기자
사진=조은정 기자



노유선기자 yoursun@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