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피해자 원혼 달랠 수 있을까, 유력 용의자 미국서 재판 중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장면.
2009년 재수사 착수, 올 5월 미국 LA서 체포
한국송환 위한 재판 진행

도피 출국땐 공시시효 정지, 15년 지나도 처벌 가능

2년 전인 2009년 9월, 한 중견 감독이 만든 영화가 국민적 공분(公憤)을 샀다.

‘9월, 그들의 살인고백이 시작된다’는 포스터 문구부터 심상치 않았던 영화는 전국적으로 70만 관객을 불러 모았고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는 사법당국이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홍기선(54)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태원 살인사건’.

홍 감독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이태원 살인사건’ 관련 사이트를 우연히 보게 됐고, 이후 영화 제작을 위해 4년간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홍 감독은 고인의 유가족은 물론이고 당시 변론을 맡았던 변호사 등 40여 명을 직접 만났다.

홍 감독은 영화에서 끝내 범인은 밝히지 않았다. 홍 감독은 “이 영화는 극적인 요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미해결로 끝난 사건을 환기시키는 게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영화가 발표된 지 2년 여 만, 사건발생 14년 6개월 만인 2011년 10월 10일,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지난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은 미국이 아더 패터슨(32)을 한국으로 송환할지 여부에 관한 것이라는 게 사법당국의 설명이다. 국민들의 눈과 귀가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의 재판 결과에 쏠리고 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사건

1997년 4월 3일 오후 10시 20분쯤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홍익대에 다니던 조중필(당시 23세)씨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흉기에 무참히 찔린 채 쓰러져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발견된 조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은 햄버거 가게에 안에 있던 한국계 미국인인 에드워드 리(당시 18세)와 미국인 아더 패터슨. 검찰은 용의자들이 서로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진술과 당시 정황 등을 토대로 리는 살인 혐의로, 패터슨은 흉기 소지 및 증거 인멸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10월 1일 재판부는 리에게는 무기징역을, 패터슨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또 이듬해인 1998년 1월 2심 재판부는 리에게 징역 20년, 패터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1998년 4월 대법원은 리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고, 1999년 9월 재상고심에서도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자 검찰은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목하며 재수사에 나섰다. 2심 선고 뒤 복역하던 패터슨은 1998년 8ㆍ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당국이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을 타 1999년 8월 미국으로 날아갔다.

피해자의 유족이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하자, 법무부는 2009년 재수사 착수를 결정했으며 지난해 미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서를 송부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범죄인이 도피를 목적으로 국외로 출국하면 즉시 시효가 중지된다.

피해자 어머니 “지난 14년은 지옥이었다. 반드시 처벌해야”

고(故) 조중필씨의 어머니인 이복수씨는 패터슨이 재판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뒤 “패터슨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떳떳하다면 왜 도망을 갔겠냐? 법이 좀 바로 섰으면 좋겠다”면서 “지난 14년은 지옥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한국으로 데려와서 재판 받게 하고, 처벌해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이어 당국의 수사에도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범인만 밝혀졌다면 살인을 한 대가만 받았으면 했지요. 그런데 범인들은 재판 받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명은 미국으로 가고, 한 명은 한국에서 애 낳고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허망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과연 법이 있나 싶어요.”

이씨는 흉악범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도 촉구했다. 이씨는 “살인범이나 아동 성폭행범 등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내 목숨이 소중하면 남의 목숨도 소중하다. 장난 삼아 사람 죽이는 사람들을 내보낸 우리나라 법이 허무하고 약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이미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한 상태고, 미국 측도 송환을 지연할 이유가 없다”며 “또 의도적으로 해외로 도피했다는 점만 입증되면 시효가 정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이번에는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터슨, 한국 송환되더라도 이른 시일 내로는 어려울 듯

아더 패터슨의 신병은 한국으로 송환될 수 있을까. 온다면 언제쯤이 될까.

현재 패터슨은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서 한국 송환을 위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패터슨이 재판 결과에 항소하지 않는다면 1심 재판만으로도 최종 송환은 결정된다.

하지만 패터슨의 항소 제기 여부를 떠나 1심 재판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이른 시일 내에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재판 기일은 한국보다 훨씬 길다. 특히 형사 재판인 경우 다음 기일이 6개월~1년씩 걸리는 게 예사다. 1심 결정이 나는 데만 2, 3년이 소요되는 이유다.

법무부도 “미국은 인도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많다. 인신보호청원 절차도 3심까지 있기 때문에 송환 일정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최종적으로는 미국 국무부 장관의 승인이 나야 패터슨을 한국으로 송환할 수 있다.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되고 나면 사법 당국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한다.

일각에서는 공소시효 완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법무부에서는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패터슨이 1999년 미국으로 넘어간 자체가 처벌을 피할 목적이었던 만큼 공소시효 정지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검찰은 리를 살인범으로 지목했다가, 나중에 패터슨으로 번복함으로써 ‘미제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 패터슨의 신병이 확보된다면 ‘과학적’ 수사를 통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최경호기자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