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만의 이미지 탈피가 성공의 최대 관건

폭넓은 대중적 인기 바탕으로 성공 데뷔했지만 총선 난관 친노
색채 뺀 새로운 정치 노선
깜짝 2위 당선, 넘어야 입지 확보… 정립이 과제

"여러분,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가자!"

민주통합당의 당대표 경선이 열린 지난 15일 경기 일산 킨텍스. 연단에 오른 한 후보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장내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홍재형 민주통합당 선거관리위원장이 일반 시민과 대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최고위원 6명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정치적이던' 문성근(59)이 마침내 '정식' 정치인이 됐다. 문성근은 민주통합당 전당대회를 통해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득표율은 16.68%로 1위 한명숙 대표(24.05%)에 이어 2위다.

'여전사' 박영선 의원, '정치 9단'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대표, 486(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단일후보인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 'TK의 대표주자' 김부겸 의원 등이 모두 순위표에서 문성근 아래에 자리했다.

이로써 민주당과 친노 그룹의 통합체인 민주통합당에서 문성근은 단숨에 넘버 2가 됐다. 정치 신인이나 다를 바 없는 문성근이 거물들을 제치고 2위로 최고위원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이 변화를 갈망한다는 방증이다.

당대표 경선을 통해 공식적인 데뷔전을 치렀지만, 문성근이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0년 전인 지난 2002년이다. 문성근은 일찌감치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동료 배우 명계남과 함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을 결성했다.

문성근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크게 한몫을 했다. 문성근의 찬조연설을 듣던 노무현 후보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이 장면은 선거운동 기간 '노무현의 눈물'이라는 CF로 제작돼 많은 유권자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어떤 혜택도 보지 않겠다"던 문성근은 2003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참여정부 출범 이후 본업인 영화배우에 충실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문성근에게는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정치적'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정치적이던' 문성근이 현실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2010년 8월. 문성근은 "MB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더는 좌시할 수 없다"며 야권 통합 작업에 참여했다. 문성근은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를 맡으며 정치를 시작했고, 18만 명의 회원이 '정치인 문성근'을 지지했다.

(좌부터)손숙, 이창동, 김명곤, 유인촌
현대건설 8년 근무

문성근은 1953년 재야운동가인 고(故) 문익환 목사와 고 박용길 장로의 3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를 졸업하고 서강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문 최고위원은 현대건설을 8년이나 다녔다.

그러다 만 서른두 살이던 1985년 황석영의 중편소설 '한씨 연대기'를 극화한 연극을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문성근이 출연한 작품(영화 25편)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고, 그의 이름 석자 앞에는 '흥행 메이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문성근은 배우가 되기 전에 이미 흔치 않은 '정치적' 경험을 했다. 문성근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정에 앉았다. 부친인 문익환 목사가 공범으로 몰리는 바람에 문성근은 '공범의 가족' 자격으로 재판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재판을 현장에서 목격한 문성근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진술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했다가, 세상에 알렸다. 문성근의 입을 통해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문성길' 연합 먹힐까

'배우' 문성근이 최고위원, 그것도 2위로 오른 것은 이변이다. 그렇지만 그간 야권 통합 진행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당대표 경선 전만 해도 문성근은 그저 다크호스 정도로만 분류됐다. 그러나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문성근의 흡인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문성근이 2위를 넘어 1위까지 넘볼 만하다"는 말이 민주통합당 안팎에서 공공연히 들렸다. 심지어 대세론을 앞세운 한명숙 후보도 문성근을 견제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지만 문성근이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당장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해야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있다.

문성근은 같은 친노 그룹 멤버인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부산 사상구),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부산 진구 을) 등과 함께 부산의 '서부 벨트' 공략에 나선다. 야권에서는 '문성길(문재인-문성근-김정길) 트리오'가 높은 지명도와 파괴력을 앞세워 금메달 사냥에 성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한나라당의 강세지역이다. 서울 강남이나, 대구ㆍ경북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파란색 깃발이 나부끼는 곳이다. 더구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의 바람이 불 경우 천하의 '돌주먹' 문성길이라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수 있다.

MB정부에 선전포고

문성근은 최고위원에 오르자마자 '야수(野首ㆍ야당 수뇌부)'의 본능을 드러내고 있다. 경선 기간 내내 MB 정부 실정을 성토했던 문성근은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또 한 번 현정부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 시민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한미FTA 국민검증위원회를 만들어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테러와 BBK, 내곡동 사저 매입 사건 등 3가지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검사제도 도입을 요구한다. 박근혜 위원장 체제인 한나라당이 이를 거부한다면, 이는 박 위원장과 이명박 정부의 공동책임이다."

문성근은 지난 18일 BBS라디오 '전경윤의 아침저널'에 출연해서는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 등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분산 서비스 거부) 사건을 '10ㆍ26 부정선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문성근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기여했지만, 정작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발을 뒤로 뺐다. 그런 문성근이 현정권에 들어서 현실정치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건설이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있는 MB와 문성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사원'일 때 이야기일 뿐이다. 새로운 MB 저격수로 부상하고 있는 문성근이다.

친노만의 색채 빼야 진정한 성공

문성근에게 1차 과제가 총선 승리라면 최종 과제는 '친노 색채' 빼기다. 사실 따지고 보면 5년 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친노다.

5년 단임제로 치러진 1987년 제13대 대선 이후 가장 큰 표차로 승패가 갈렸던 게 지난 17대 대선이다. 진보진영은 16대 때 58만 표차로 이겼지만, 17대 때는 532만 표차로 졌다.

2007년 대선 직후인 12월 26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자신의 블로그에 "친노라고 불린 우리는 폐족입니다"라고 크게 탄식했다. 폐족(廢族)은 조상이 큰 죄를 짓는 바람에 벼슬할 수 없는 후손을 의미한다.

하지만 폐족으로 몰렸던 친노 그룹은 2010년 지방선거를 통해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리틀 노무현'이라는 김두관은 경남지사, '좌 희정 우 광재'의 안희정과 이광재는 각각 충남지사와 강원지사가 됐다.

그리고 2007년 대선 이후 5년 만인 2012년 또 한 명의 친노 인사인 문성근이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두말 할 것 없이 문성근도 '노무현 간판'으로 거대 야당의 수뇌부가 됐다.

그렇지만 친노만으로는 외연을 넓히는 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평가는 그리 후한 편이 못 됐다. 당장 민주통합당 당대표 경선이 끝나자마자 "도로 열린우리당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문성근은 경선 다음달인 지난 16일 당의 새 지도부와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리고 문성근은 "김대중 대통령은 아버지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형님"이라고 강조했다.

문성근은 18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이렇게 말했다. "새 지도부 구성으로 민주정부 10년 대 박근혜 구도가 됐습니다." 노무현 대 박근혜 구도가 완성됐다는 지적에 대한 반박이자 자신의 노선을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다.

'정치인' 문성근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손숙·김명곤·이창동·유인촌 등 장관 출신

●배우 출신 정치인 누가 있나

미국 시러큐스대에서 대중문화를 전공하는 로버트 톰슨 교수는 "TV 시대에는 정치인의 일이 배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TV를 통해 얼굴과 이름을 알린 배우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배우 출신 정치인의 성공 비결을 설명했다.

단숨에 제1야당의 '넘버2'가 된 문성근 말고도 배우 출신 정치인은 제법 된다. 영화 '서편제'로 이름을 날린 김명곤 감독은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 3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김 전 장관은 영화에 몸담기 전에는 기자로 활동했다.

이창동 영화 감독도 참여정부 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올랐다. 이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던 2003년 2월에 장관에 오른 뒤 1년4개월 동안 부처를 이끌었다.

브라운관, 스크린, 무대를 넘나들며 어머니 이미지로 어필했던 손숙은 국민의 정부 시절이던 1999년 환경부 장관에 선임됐다. 손 전 장관은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의 경험이 입각하는 데 큰 힘이 됐지만, 격려금 파문에 휘말린 끝에 한 달 만에 물러났다.

현정부에서는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눈에 띈다. 유 전 장관은 현정부가 출범한 2008년 2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3년간 문체부의 수장 자리를 지켰고, 같은 해 7월에는 대통령 문화특별보좌관에 선임되는 등 엄청난 '관운'을 누렸다.

이 밖에도 강부자(14대), 이순재 최불암 정한용(이상 15대), 신영균(15, 16대), 강신성일(16대) 등이 배우 출신 중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케이스다. 18대 현역의원 중 배우 출신은 김을동과 최종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정치인으로 변신한 배우들의 성공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40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세계 최강국'의 리더가 됐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인 캘리포니아에서 주지사를 지냈다.

●문성근(文盛瑾)은

•출생: 1953년 5월 28일(일본)
•출신교: 보성고-서강대 무역학과
•1978~1985년: 한라건설 근무
•1985년: 연극배우 데뷔
•1996년: 한국영화연구소 이사
•1997~2002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
•2000~2002년: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이사장
•2002년: 새천년 민주당 인천부평지구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영화학과 겸임교수
•2003~2004년: KBS '인물현대사' 진행
•2004년: 열린우리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
•2010년: 백만 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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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