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집게 강의 해커스어학원 첨단장비로 문제 유출

'해커스의 녹음장치' 해커스어학원 직원이 토익과 텝스 시험 문제를 유출할때사용한 만년필형 녹음기.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는 각종 녹음기를 압수해서 공개했다. 연합뉴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오차 없는 '족집게'에는 이유가 있었다. 토익(TOEIC)과 텝스(TEPS) 족집게 강의로 소문난 해커스어학원이 기출문제를 유출해 왔다는 사실이 검찰수사 결과,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 제1부(김영종 부장검사)는 지난 6일 토익과 텝스 시험 문제를 조직적으로 빼돌려 강의 및 교재 자료로 사용해온 혐의로 조모(53) 해커스어학교육그룹 회장을 불구속 기소하고, 김모(42) 해커스어학원 연구소 대표 등 4명을 약식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해커스어학원이 시험 문제를 유출해 토익 시험을 주관하는 미국교육평가원(ETS)의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해커스어학원은 ETS가 기출 문제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해명했다. 시험 문제를 유출한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ETS가 수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정보 독점의 폐해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강사는 "문제 유출은 학원가의 오래된 관행이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적발된 해커스어학원은 오래 전부터 기출문제 유출의 진원지로 손꼽혔다. 토익 시험을 주관하는 ETS는 한국에서 종종 시험 문제가 유출되자 한국인용 시험문제를 별도로 제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해커스어학원의 조모 회장 등은 2007년 10월부터 지난달까지 ETS가 주관하는 토익 시험과 서울대 언어교육원이 시행하는 텝스 시험 문제를 몰래 녹음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106회나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토익은 49회분, 텝스는 57회분이 유출된 걸로 알려졌다.

해커스어학원측은 아주 조직적으로 문제를 복원한 것으로 수사결과 드러났다. 조 회장은 우선 독해와 듣기 등으로 나눠 외우거나 녹음할 문제를 직원 38명에게 할당했다. 두 문제씩 외운 직원들은 시험이 끝나면 1시간30분 내에 문제와 정답을 전달했고, 외국인 검토까지 거치면 시험 문제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듣기 문제를 녹음하는 수법도 치밀했다. 외국에서 수입한 특수 녹음기를 헤드폰과 귀 사이에 끼워 녹음했다. 초소형 카메라를 장착한 만년필형 녹화 장비도 이용했다. 해커스어학원은 시험 후기 문장을 최소화하면서 기출문제 변형 과정에서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법무팀과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복원한 문제로는 영어 학원가는 토익 족집게 명성을 외국에까지 떨쳤다. 한 일본인은 지난해 12월 해커스어학원 홈페이지에 게시된 기출문제를 공부한 뒤 일본에서 치른 토익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비슷한 사례가 종종 있었던 일본과 대만 토익위원회는 해커스어학원 홈페이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한국 토익위원회 요청에 따라 검찰이 해커스어학원을 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막상 어떤 형식으로든 토익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수험생 사이에선 ETS를 비난하는 여론이 많다. ETS가 기출 문제를 공개하지 않아 어떤 문제를 왜 틀렸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응시료를 4만2,000원이나 내고 시험을 치르지만 채점조차 불가능한 상황. 수험생들은 "ETS가 시험 결과를 늦게 알려줘 불필요하게 다음달 시험을 접수하는 경우도 많다"는 불만도 털어놓았다. 그러니 수험생들은 해커스어학원 등 토익 관련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시험 후기를 통해 정답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해커스어학원은 "문제를 유출하는 학습자를 부정행위자로 처리하면서 수많은 학습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있다"면서 "검찰 수사가 정보 독점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수험생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토익 시험을 치른 사람들 사이에는 학원마다 기출 문제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다. 강사들은 기출 문제를 제시하면서 예상 문제 풀이까지 해왔기 때문이다.

해커스어학원측도 검찰 수사에서 해커스뿐만 아니라 다른 학원 강사들도 시험장에서 가 문제를 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알고 나와 기출문제집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토익과 텝스 수험생도 해커스어학원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이다. 기출문제를 토익 관련 홈페이지에 올려 공유하는 건 오래 전부터 있었던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번 해커스어학원 사건은 학원 강사와 일부 수험생의 기억을 되살려 몇 문제를 복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직원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시험 문제를 불법 유출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 다만 저작권법위반에 대해선 피해 여부를 가리기 어렵고 양형 기준이 낮고 세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양형 기준을 마련해달라고 건의했다.

법원 관계자는 "저작권법 위반 혐의는 문제를 창작했는지에 달렸다. 창작성이 인정되는 문제의 핵심을 베꼈다면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설명했다. 의사고시 수험생이 기억에 의존해 기출 문제를 책으로 출판한 사건에 대해 법원은 최근 무단 복제라는 판결을 내린 적 있다. 해커스어학원은 "영어교재는 모두 새롭게 만든 창작 문제라서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검찰 수사는 기출 문제에 대한 정보 독점을 정당화해 수험생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기소된 조모 회장은 그동안 신분을 숨겨왔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지방 국립대 영문과 교수라는 사실이 탄로났다. 국가공무원법에 명시된 영리 업무 및 겸직 금지 의무를 어긴 셈이다. 조모 회장은 비상장법인인 해커스어학교육그룹 주식을 가족 명의와 차명으로 100% 보유 중이다. 해커스어학교육그룹은 2010년에 매출 1,000억원, 당기순이익 360억원을 기록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