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협회 지회장이 가수 꿈 못버린 중년여성에 2억여원 갈취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중년 여성이라면 KBS 1TV '전국노래자랑'에 출연시켜주겠다는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KBS 전국노래자랑은 1980년부터 33년째 방송되고 있는 최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은 가수를 꿈꿨던 모든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최근 가수 지망생에게 전국노래자랑 출연을 미끼로 돈을 갈취하고 성폭행까지 한 연예기획사 대표가 붙잡혔다.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수면제를 먹여 가수 지망생을 성폭행하고 수시로 협박해 3억여 원을 뜯어낸 혐의로 A 협회 지회장이자 B 기획사 대표인 안모(49)씨를 구속했다고 지난달 28일 발표했다. 안씨가 '전국노래자랑 등에 출연시켜 주겠다'고 유인해 성폭행한 여성은 최소 세 명인 걸로 알려졌다.

가수 지망생인 피해자 박모(40)씨는 몇 차례 유산을 겪어 우울증을 앓았다. 마음이 괴로웠던 그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노래강사로 자원 봉사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박씨는 2010년 2월 문화센터를 방문한 트로트 가수에게서 안씨를 소개받았다. 유명 연예기획사 대표라는 안씨는 박씨에게 성인가수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비극의 씨앗은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갈망이었다. 안씨는 피해자에게 전국노래자랑에 출연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전국노래자랑에 초대가수로 출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푼 박씨에게 안씨는 돈을 요구했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려면 음반을 내야 한다, 노래강사 자격증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등등. 피해자가 돈을 건네면 안씨는 새로운 구실을 만들었다.

지난해 3월에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안씨는 방송 출연이 있는 것처럼 박씨를 꼬여 경기 시흥시 월곶 포구로 데려갔다. 그리고 식당에서 식사한 뒤 박씨 커피에 몰래 수면유도제 슬리펠을 섞었다. 슬리펠은 30분 이내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력해 최면진정제로도 사용된다. 정신을 잃은 박씨는 주변에 있던 숙박업소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안씨는 휴대전화 카메라로 피해자 알몸을 촬영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씨에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사진을 남편에게 전송하겠다"고 협박했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할 수 있다는 희망은 돈과 몸까지 뺏긴 채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려면 돈이 필요할까? 또 연예기획사 대표라면 KBS에 부탁해 박씨를 초대가수로 만들 수 있을까?

KBS 예능제작국 김영도 책임프로듀서(CP)는 2일 "금품을 주고 전국노래자랑 초대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고 단언했다. 전국노래자랑에는 초대가수가 다섯 명 정도 출연한다. 김 CP는 "물론 신인가수도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하다. 그러나 실력이 출중하거나 음악 발전에 도움이 될만한 재능이 없다면 출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반인 출연에 대해 김 CP는 "지자체가 2~3주 전에 예심 공고를 내면 1차 예심과 2차 본심을 통해 15명을 뽑는다"며 "노래 실력이 뛰어나거나 재주가 돋보이지 않는데 돈과 인맥으로 TV에 출연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해자 안씨는 방송 관련 제작자로 일해왔고, 2008년 11월부터는 A 협회 지회장으로 활동했다. 유명 가수에게서 소개를 받은 터라 피해자 박씨는 안씨의 말을 믿었다. 이 소식을 들은 KBS 예능제작국 유찬욱 총괄프로듀서(EP)는 "TV 출연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면 일단 사기꾼으로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V에서 본 적 있는 연예인이나 연예기획사 관계자라도 가수나 배우로 만들어주겠다며 돈과 성 상납을 요구하면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EP는 "금품과 성 상납을 통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다는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나체 사진과 동영상을 가진 안씨는 더욱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그렇게 박씨가 빼앗긴 돈은 총 2억여 원. 명목은 음반 제작, 노래강사 자격증 발급, 협회 관계자 접대비 등 다양했다. 경찰은 안씨가 성폭행한 가수지망생 세 명에게서 받은 돈은 총 3억여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안 박씨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가해자는 오히려 성 상납을 들먹였다. 지난해 10월 "왜 방송에 출연시켜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박씨에게 안씨는 "시키는 대로 성 접대를 하지 않아 출연시키지 않는다"며 폭행했다. 수차례 폭력에 박씨는 전치 6주에 해당하는 상처를 입었고, 휴대전화를 뺏긴 채 지하 스튜디오에서 11시간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안씨는 다른 가수지망생과 무명가수 등 세 명에게도 상습 폭행을 일삼은 걸로 알려졌다.

참다 못한 박씨는 지난해 12월 안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지난달 22일 잠복 끝에 안씨를 붙잡았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 안씨가 돈을 받고 내준 노래강사 자격증은 비공인 자격증이었다. 자격증은 지회장이 추천하면 협회가 발급하는 회원증에 가까웠지만 안씨는 무명가수가 아닌 일반인에게 30만~200만원을 받고 판매했다. 경찰은 방송 출연을 미끼로 금품을 빼앗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과 성 상납 등의 피해가 있었는지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와 KBS 예능국은 이구동성으로 "최근 연예인 지망생에게 성 상납을 요구하는 사건이 많은데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