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속담이 있다. 아들이 여러 면에서 아버지를 닮았을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재계에서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녀 간도 있다. 현정은 현대 회장-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와 더불어 이명희 신세계 회장-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재계의 대표적인 모전여전 CEO로 위명을 떨치고 있다.

엄마 따라다니며 경영수업

정유경 부사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막내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2년생인 정 부사장은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비주얼디자인 전공으로 입학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정 부사장은 1996년 신세계 계열사인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입사, 2003년 조선호텔 프로젝트 실장(상무)을 거쳐 2009년 신세계 부사장에 올랐다.

객실 리노베이션, 인테리어 개선 등 조선호텔에서 주로 전공을 살린 역할을 잘 수행했던 정 부사장은 신세계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경영보폭을 크게 넓혔다. 2007년 본점 본관(명품관) 오픈, 2009년 신세계 센텀시티 오픈 등 신세계가 선보인 프로젝트에서 혁신과 방향성을 화두로 제시하며 신세계를 '월드 클래스'급으로 도약시켰다는 평이다.

2009년 부산에 국내 최대 규모로 문을 연 신세계 센텀시티점은 정 부사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 부사장은 센텀시티점을 준비하며 수시로 중동 두바이, 일본 도쿄, 미국 올랜도 등 세계 곳곳의 쇼핑몰을 찾아다니며 벤치마킹했다. 부산의 신생 백화점에 샤넬, 에르메스 등 최고급 브랜드가 입점한 것도 해당 브랜드 관계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 설득했던 정 부사장의 공이라고 전한다.

정 부사장은 주로 모친인 이 회장을 따라다니며 경영수업을 착실히 받았다. 이 회장의 해외 출장마다 함께하며 사업 감각을 키웠다는 내용이다. 강력한 카리스마 속에 내재된 부드러움 등 이 회장과 비슷한 경영스타일로 '리틀 이명희'라고 불릴 정도다. 디자인 전문가로서 인테리어, 광고디자인, 문화예술마케팅 분야 등에서 오빠인 정용진 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에 일조하고 있다.

오빠 두 자녀에게 지극정성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오빠,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는 달리 정유경 부사장은 언론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많지 않다. 사촌인 이부진 사장, 이서현 부사장에 비해서도 한결 조용하다. 크게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정 부사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경영스타일이나 성격을 설명할 때 '사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정 부사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경영상 원칙 중 하나는 인재다.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보는 정 부사장은 평소 '센스가 있으면서 핵심을 짚어내는 인재' 영입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프리랜서였던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 동창 이보영 상무를 2010년 12월 영입한 것은 정 부사장 인재경영의 대표적 사례다.

하나뿐인 오빠 정 부회장과의 돈독한 관계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정 부사장은 2003년 탤런트 고현정 씨와 이혼한 정 부회장의 두 자녀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정 부회장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자녀들 학원까지 직접 챙겼을 정도다. 이에 정 부회장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여동생이 내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을 해준 것은 어떤 말로도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영권 분할로 이어지나

지난해 5월 재계의 시선은 인적분할을 통해 백화점 사업부문을 담당할 신세계와 대형마트 사업부문을 담당할 이마트로 기업분할한 신세계에 쏠렸다. 분할과정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사람은 대표이사로 그룹을 떠맡고 있는 정용진 부회장이 아닌 동생 정유경 부사장이었다. 정 부사장이 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그룹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울 것이라 예상되는 까닭이다.

당시 신세계 측은 분할목적과 배경에 대해 전문성을 제고하고 핵심경쟁력을 강화하여 기업가치 및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라고 공시했다.

그러나 기업분할을 지켜본 상당수의 재계 관계자들은 정 부사장의 '분가'를 위한 사전조치라고 해석하고 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사업적 측면으로만 본다면 이마트와 백화점은 굳이 독립경영체제로 나눌 이유가 없다"며 "과거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이명희 회장에게 백화점과 호텔 부문을 물려준 것처럼 이 회장도 정 부사장에게 경영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 아니겠냐"고 전했다. 정 부회장이 신설법인인 이마트를 맡고 정 부사장이 존속법인인 신세계를 이끌어나갈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당초 전문가들은 정 부사장이 자신의 전문분야인 호텔과 패션부문만을 이끌지 않겠느냐고 예상했다. 유통부문으로 묶을 수 있는 백화점과 이마트는 정 부회장이 가져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기업분할에 따라 정 부사장이 호텔, 패션부문과 더불어 백화점까지 총괄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 부사장에 대한 재계의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기업분할에 따른 경영권분할설에 대해 신세계 측은 정 부회장의 원톱체제는 변함없다는 입장을 꾸준히 취하고 있다. 정 부회장 또한 분할 직전인 지난해 4월 말 "신세계의 의사결정은 이명희 회장과 구학서 회장, 제가 지금과 똑같이 논의하게 될 것"이라며 "정 부사장은 디자인 등 전문적인 업무 차원에서 경영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신세계 기업분할 때 적용된 인적분할 방식이 최근 몇 년 동안 후계 구도를 준비하는 대기업들이 선호했던 방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전히 후계 승계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은 무게를 갖고 있다. 만약 정 부회장과 정 부사장이 사이좋게 이마트와 신세계를 나눠 맡게 된다면 서로가 보유하고 있는 상대방 지분만 맞교환함으로써 지분정리를 깔끔히 끝낼 수 있게 된다. 남은 것은 분할된 신세계와 이마트의 지분 17.30%를 지니고 있는 이 회장의 선택뿐이다.

논란 '빵집 사업' 향방은?

조선호텔과 신세계를 거치며 어느 정도 입지를 쌓아온 정유경 부사장이지만 올해 초 불거진 빵집 논란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삼성, 현대, 롯데 등 재벌가의 딸들이 경쟁적으로 빵 장사에 나서 골목상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지난 1월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재벌들의 골목상권 장악을 비판하자 결국 이부진 사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장선윤 블리스 사장이 차례로 사업철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재벌가 딸들 중 유독 정 부사장만은 베이커리 사업을 고수하고 있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 베이커리 사업 특혜조사의 강도도 높아졌다. 이에 신세계 측은 "조선호텔베이커리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하는 서민 업종, 골목ㆍ동네 상권을 침해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사업철수를 결정한 다른 재벌가 딸들과 정 부사장은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장선윤 사장이나 사업지분이 전혀 없는 이부진 사장과는 달리 정 사장은 2005년부터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는 조선호텔베이커리의 지분 40%를 지니고 있다. 이에 신세계 관계자는 "정 부사장은 조선호텔베이커리의 지분을 보유했을 뿐 사업경영 등에는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