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3월 22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11개 계열사와 1·2차 협력사 대표, 정부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그룹·협력사, 2012년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을 개최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삼성그룹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이 연달아 동반성장 강화를 선포하고 나섰다. 저마다 1, 2차 협력사들과의 협약식을 열고 자사의 동반성장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상생경영을 대폭 확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매년 반복되는 결의가 무색하게 실제 지표로 드러나는 움직임은 초라하다는 지적이다. 5대그룹의 상당수 주요계열사가 협력업체에 외상결제를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간 외쳤던 동반성장 구호가 공염불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5대그룹 "동반성장 강화"

국내 주요그룹들이 협력사들과 함께 협약식을 체결하고 동반성장 실천계획을 발표하는 등 동반성장에 열심이다. 연례행사의 측면도 없진 않지만 총ㆍ대선이 연달아 있는 올해 특히 거세진 정부부처 및 정치권의 동반성장 요청에 발맞춘 행동으로 읽힌다.

동반성장 협약식의 포문을 연 것은 재계 1위 삼성그룹이었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22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11개 계열사와 1ㆍ2차 협력사 대표, 정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삼성그룹ㆍ협력사, 2012년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을 개최했다. 한철수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 정영태 동반성장위원회 사무총장, 조유현 중소기업중앙회 본부장 등이 참석한 이날 협약식에서는 삼성그룹 11개 계열사가 1차 협력사 3,270개와 협약을 맺고 1차 협력사가 다시 2차 협력사 1,269개와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동반성장을 다짐했다.

현대·기아차가 지난해 3월 56개 동반성장 평가 대상 기업 중 처음으로 1585개 협력사와 동반성장 협약 체결식을 가졌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삼성그룹은 지난해 처음으로 협약식을 갖고 동반성장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1차 협력사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현금성 결제 대금지급 횟수를 월 2회에서 3회로 확대하는 등 다양한 실천방안을 마련한 바 있다.

지난달 22일에는 현대차그룹도 동반성장 협약식을 열었다. 현대차그룹은 자사의 11개 계열사와 2,560여개 중소 협력사가 함께 체결한 '2012 동반성장 협약'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동반성장 구현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현대차그룹의 협약식에 참석한 협력사 수는 지난해 2,200여개사에서 16% 늘어났다. 현대차그룹은 2, 3차 협력사에 대한 자금지원 규모를 대폭 증대하고 고용창출, 교육훈련 등에도 집중할 계획이다.

포스코그룹 또한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에서 '2012 포스코패밀리 동반성장협의회'를 개최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포스코패밀리 동반성장협의회는 공급사, 고객사, 외주사 등 포스코그룹과 거래하는 대표 협력회사들과 그룹 계열사들이 모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동반성장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모임이다. 포스코그룹은 올해부터 동반성장협의회 범위를 2차 협력사까지 확대, 실질적인 도움을 줄 계획이다.

SK그룹은 올해 2, 3차 협력사를 포함한 중소 협력업체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교육ㆍ기술ㆍ자금 등 3대 분야의 동반성장 경영을 크게 확대할 예정이다. SK그룹이 지난 3일 발표한 '2012 동반성장 실천계획'에 따르면 올해 협력업체 임직원의 역량개발을 지원하는 'SK동반성장아카데미'의 해외연수, 중소 협력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재교육 프로그램 '동반성장 MBA'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SK그룹은 금융기관과 연계, 협력사들에게 저리로 대출자금을 지원하는 '동반성장 펀드' 규모를 늘리는 등 자금 지원 방안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LG그룹의 경우 LG전자만 자사 협력회와 함께 'LG전자 1, 2차 협력회사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을 지난달 22일 열었다. 올해 초 1차 협력회사 500개사와 '하도급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을 맺은 데 이어 이번에 2차 협력회사 100여개가 참여하면서 동반성장이 LG전자의 모든 협력회사로 확대되는 기반을 다지게 됐다.

공염불 구호 뒤 외상거래 ↑

협력사들과의 동반성장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렬히 보이고 있는 5대그룹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액션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받고 있다. 주요 그룹들의 동반성장 발언이 최근 몇 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수치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주간한국이 동반성장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주요지표 중 하나인 '매입채무회전율'을 확인한 결과 5대그룹 주요계열사 중 상당수가 지난 1년 동안 협력회사들에게 해왔던 외상거래 비중을 높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매입채무는 기업이 거래처로부터 물품 등을 외상으로 매입할 때 발생하는 채무다. 거래에서 발생한 미불금인 외상매입금과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어음상의 채무인 지급어음을 합한 개념으로 신용거래의 일종이다. 매입채무회전율은 매입채무의 변제속도를 표시하는 비율로 일정 기간 동안 매입채무가 몇 번 회전되는가를 나타낸다. 보통 1년을 기준으로 하며 매출을 매입채무로 나누어 계산한다.

매입채무회전율이 낮다는 것은 단순히 해당 기업의 재무상태가 불안하다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기업이 협력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협력사로부터 원재료를 외상으로 사고 최대한 늦게 지급하고 있다고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대기업의 매입채무회전율이 낮아지는 만큼 협력사들은 자금이 원활히 융통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어떤 대기업의 매입채무회전율이 낮아지고 있다면 그만큼 협력사들과의 동반성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매입채무회전율 하락

주간한국이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확인해본 결과 동반성장을 외친 상당수 5대그룹 계열사의 매입채무회전율이 2010년보다 낮아졌다. 동반성장 협약식을 체결한 5대그룹 계열사 중 주요계열사의 2010년ㆍ2011년 매출 및 매입채무를 확인, 매입채무회전율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살펴봤다.

삼성그룹에서는 대표 계열사인 삼성전자부터 매입채무회전율이 떨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역대 최대인 120조8,16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2010년의 112조2,495억원과 비교해 7.6%나 성장한 수치다. 그러나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매입채무는 6조225억원에서 6조9,835억원으로 16%나 상승했다. 그 결과 2010년 18.6이었던 삼성전자의 매입채무는 2011년 17.3으로 7.2% 감소했다.

석유화학, 정유가스, 산업설비 등의 엔지니어링 전문업체인 삼성엔지니어링의 매입채무도 떨어졌다. 삼성엔지니어링의 매출은 1년 동안 70% 가까이(4조7,990억원→8조1,382억원) 성장했지만 같은 기간 매입채무는 100% 넘게(8,576억원→1조7,198억원) 폭등했다. 매입채무회전율은 5.6에서 4.7로 떨어졌다.

지난해 삼성 SDI의 매입채무회전율은 6.3을 기록했다. 2010년 6.8보다 소폭 감소한 수치다. 매출증가율(14.0% 3조9,807억원→4조5,390억원)보다 매입채무의 증가율이(22.7% 5,894억원→7,231억원) 높았던 까닭이다.

매입채무회전율이 하락한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삼성SDI를 제외하고 지난해 좋은 실적을 거뒀다. 매출은 물론이고 영업이익과 유동비율 등 각종 지표들 모두 높은 폭으로 상승했다. 매입채무회전율이 떨어진 상황에서 좋은 실적을 거둠으로써 협력사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성장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커졌다.

LG그룹에서는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 LG이노텍 등 다수 계열사의 매입채무회전율이 낮아졌다. 이중 LG유플러스의 경우 2010년 27.0이었던 매입채무회전율이 절반 수준인 14.5로 대폭 낮아졌다. 이번에 확인된 5대그룹 주요계열사 중 최대 하락폭이다. 지난해 LG유플러스는 전년(8조4,985억원) 대비 8.9% 증가한 9조2,51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매입채무가 두 배 이상(102.5% 3,143억원→6,365억원) 늘어나면서 매입채무회전율이 크게 떨어졌다.

LG디스플레이도 높은 매입채무회전율 하락폭을 기록했다. LG디스플레이의 지난해 매출은 2010년보다 6.1%나 하락했다. 2010년 25조43억원의 LG디스플레이 매출은 지난해 23조4,713억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매입채무는 2조9,864억원에서 3조7,527억원으로 상승하면서 매입채무회전율이 크게 하락했다.

매입채무회전율이 떨어진 LG그룹 계열사들은 대부분 지난해 실적이 좋지 않았던 곳들이었다. LG디스플레이와 LG이노텍은 아예 적자전환했고 LG유플러스도 유동비율이 크게 떨어졌다. 대기업의 실적악화가 고스란히 협력사들의 부담으로 이어진 셈이다.

포스코그룹 주요계열사 중 매입채무회전율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진 곳은 포스코건설이다. 포스코건설의 매입채무회전율은 매출이 하락하고(6조2,484억원→6조1,420억원) 매입채무가 늘어난(5,300억원→9,089억원) 것에 힘입어 2010년 11.8에서 지난해 6.8까지 떨어졌다.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수주실적 1위를 차지하며 기염을 토했지만 협력사들의 외상값은 최대한 늦게 갚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체면을 구기게 됐다. 포스코ICT(11.8→9.4)와 포스코강판(7.3→6.2)이 뒤를 이었다.

현대차그룹과 SK그룹은 대다수 주요계열사의 매입채무회전율이 상승했다. 다른 그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동반성장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계열사도 대부분 매입채무가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늘어난 매입채무를 바탕으로 좋은 실적을 거둔 셈이다. 이번에 확인된 5대그룹 25개 주요계열사 중 매입채무가 줄어든 곳은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현대제철, SK텔레콤, SKC, LG전자, 포스코특수강 등 7개사뿐이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