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 파문 속, 당권파 변호에만 치중

발을 빼려 할수록 오히려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당의 비례대표 부정 선거 파문 그리고 사태 발생 후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편파적, 종파주의적 행보 때문이다.

'진보의 아이콘'인 이정희(43) 대표와 통합진보당이 치유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었다. 도덕성이 생명이라는 진보 진영의 간판들이기에 부정 선거 논란은 파문을 넘어 충격 그 자체다.

이 대표 개인적으로는 지난 4ㆍ11 총선 직전 서울 관악을 지역의 야권 단일후보 경선 과정에서 여론조사 조작 파문에 이어 두 번째 부정 시비에 휘말렸다. 당시 이 대표는 후보 사퇴 결정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대중의 실망감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총선 후 몸을 추스르는 듯하던 이 대표가 다시 비틀거리고 있다. 부정 선거의 배후로 이 대표가 이끌던 구 민주노동당 계열이 지목되면서 사태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현재 통합진보당의 부정 선거 의혹은 정국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다.

하지만 당의 얼굴 격이자 당권파인 이 대표는 지난 8일 비례대표 부정 경선 진상조사를 반박하는 공청회에서 "유죄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며 당권파 변호에만 치중했다.

4.11총선때 이정희 대표가 부군 심재환 변호사와 함께 투표하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9일에도 한 라디오에 출연해 "진상조사보고서를 깨끗한 눈으로 봤더니 사실 확인이 전혀 없는, 무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진상조사위가 당 전체에 대해 누명을 씌운 것"이라며 비당권파가 제기하는 부정 선거 의혹을 일축했다.

도덕성 훼손된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 파문은 총선 직후 당 내부의 폭로에서 비롯됐다. 총선 직전 비례대표 당내 경선 때 순위 조작이 있었다는 게 폭로의 핵심이다. 지난 3월 14~18일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한 노항래(국민참여당 출신) 후보를 10번으로 하고, 대신 윤금순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과 이석기 전 민중의 소리 이사를 각각 1, 2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순위가 조작됐다는 것이다.

국민참여당 출신의 이청호 부산 금정구 지역위원장은 당 홈페이지를 통해 민주노동당 업무를 10년 넘게 담당해온 전산관리업체가 비례대표 선거 실무를 맡았으며,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의 지시로 투표가 진행되는 도중 온라인 투표 내용을 알 수 있는 '소스 코드'를 3차례 열람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내용의 폭로가 이어지자 당은 지난달 12일 조준호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조 대표는 지난 2일 "총선 당시 당내 비례대표 경선 현장투표가 진행된 7곳의 투표소에서 부정선거가 벌어졌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5월 7일 국회서 열린 통합진보당 대표단 회의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심상정(왼쪽).이정희 공동대표
파문이 확산되자 비당권파인 윤 당선자는 비례대표에서 사퇴했지만, 당권파인 이석기 당선자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당선자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10여 년간 수배 및 수감 생활을 하다 2003년에 석방됐고, 이후 '민중의 소리'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당권파의 숨은 실세로 불렸다.

이 대표는 지난 8일 "조작 의혹만 있을 뿐 조작이 자행됐다는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못했다"며 온라인 투표 조작 의혹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대표는 이어 "동일IP 투표는 공동생활을 하는 노동 현장의 관행에 따른 현상인데도 이석기 당선자만 집중적으로 조사해 마치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의혹을 부풀렸다"며 비당권파와 진상조사위원회에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조준호 위원장은 지난 9일에도 "현장 투표의 부정 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 당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유효로 인정한 4,525표 가운데 24.2%인 1,095표가 규정상 무효 처리 대상이었다"면서 "이를 반영하지 않은 중앙선관위 발표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총체적 부실ㆍ부정 선거라고 규정한 것"이라고 재반박했다.

학력고사 전국수석 이정희

지난 8일 이정희 대표가 공청회 석상서 김재연 당선자의 손을 잡고 격려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정희 대표는 '진보의 아이콘'으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누렸다. 만 43세인 이 대표를 두고 "보수 진영의 박근혜 못지않은 야권의 거물로 성장할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이정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직' '원칙' '강단' '성실'이었다.

이 대표는 봉천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다. 젊어서부터 두부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온 이 대표의 부친은 지금도 같은 일을 한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처럼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

서울대 법대 87학번인 이 대표는 1987년 대학입학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전국 여자 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고1때 자신을 가르쳤던 한 교사의 영향을 받아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시절 이 대표는 총여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성 문제에 눈을 뜨면서 학생회 일을 맡게 됐고, 성차별을 사회 구조적으로 인식한 것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사법시험을 준비한 것은 대학 졸업 후다. "구체적인 문제를 푸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법률가가 되기로 했다"는 게 이 대표가 사범시험에 도전하게 된 이유다.

의정활동 여성의원 1위 이정희

199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 대표는 판사로 임용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아주 우수하지는 않았던 터라 수도권이 아닌 지방 발령이 유력했다.

남편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이 대표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기로 했다. 이 대표는 남편 심재환 변호사와는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동료다.

이 대표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부터다. 이 대표는 이듬해 4월 치러진 18대 총선 때 비례대표 3번 공천을 받아 여의도에 입성했고, 지난 4년간 눈부신 의정활동을 펼쳤다.

2010년 한 언론사가 국회의원 보좌관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이 대표는 '돋보이는 의정활동을 한 여성의원'에서 1위에 올랐고, '같이 일하고 싶은 국회의원' 항목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공동 2위를 차지했다.

그런 이 대표이지만 작금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8일 한 인터넷 언론은 이 대표가 2007년 D법무법인 변호사로 재직하던 중 비정규직 해고와 임금 협상을 둘러싼 노사 간의 소송 때 사측 대리인을 맡아 사측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보도했다.

이 대표 측은 "당시 회사 측 고문을 맡고 있던 동료 변호사가 같은 법무법인 소속이었던 이 대표에게 의뢰한 사건"이라며 "직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노조 측은 "당시 이정희 변호사는 통상 노조를 탄압하는 변호사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이에 앞서 지난 7일 대표단 회의에서는 당권파가 여론 재판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땠을까? 많은 의혹과 여론의 뭇매를 맞으셨다"고 말했다가 그야말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불과 두 달 새 여러 파문의 중심에 선 이 대표가 어쩌면 정치생명을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한 야권 관계자는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맺어지든 이 대표는 이미 많은 신뢰를 상실했다"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통합진보당은 지난해 12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 민주노총 등이 뭉친 진보 진영의 대통합체다. 통합진보당은 구 민주당, 친노 진영, 한국노총, 시민사회단체 등이 연대한 민주통합당과 범야권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당내 폭로에서 촉발됐다는 점과 국민참여당 출신 인사들이 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당이 존폐 기로에 섰다는 말도 과언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부정 선거 의혹 파문을 계기로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대표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이 대표는 "부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부정 덩어리로 당원 전체가 그리고 당 전체가 오명을 뒤집어쓸 정도는 아니다"라며 마녀사냥 중단을 촉구했다.

이에 유 대표는 "당 스스로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투표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규칙이 훼손됐다는 정황이 너무 뚜렷하다"고 반박했다.

통합진보당은 이정희(민주노동당) 심상정(진보신당) 유시민(국민참여당) 조준호(민주노총) 공동대표 체제다. 하지만 사실상 당권은 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잡고 있다.

때문에 이번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당권파인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들이 당권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내달 3일 새 지도부를 구성할 예정이다. 그럴 경우 당권파가 재집권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관측도 있다. 민주노동당 계열 자주파(NL)의 세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통합 당시 자주파의 지분은 55%였지만 인천연합과 울산연합 일부가 비당권파 쪽으로 이동하면서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의 세가 45% 정도로 축소됐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반면 국민참여당 계열과 진보신당 탈당파인 새진보통합연대(PD)를 합치면 40%쯤 되고, 여기에 인천연합과 울산연합 일부를 더하면 과반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50명 규모인 전국운영위원회(28명이 비당권파)와 달리 953명에 이르는 중앙위원회의 경우 개인별 성향 파악이 쉽지 않은 데다 캐스팅보트 역할을 자처하는 울산연합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투표권을 가진 7만5,000여 명의 당원 중 당권파는 대략 3만 명으로 추산된다. 숫자만 보면 당권파가 불리한 듯하다. 하지만 결집력을 고려하면 당권파를 소수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분당 이야기까지 거론되고 있지만 이 대표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 대표는 지난 9일 "신뢰가 크게 무너졌지만 국민참여당과 통합할 때 갈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내 인생을 걸고 한 약속이라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며 분당 가능성을 일축했다.

외대 총학생회장때 당권파와 인연… 차세대 '꿈나무'
● 주목받는 김재연 당선자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대표가 부정 선거 파문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김재연(32ㆍ비례대표 3번) 당선자도 거센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김 당선자는 경기동부연합 등 당권파가 이 대표에 이어 당의 '얼굴'로 내세우기 위해 공을 들이는 인물이다.

당권파가 비당권파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이석기(50ㆍ비례대표 2번) 당선자와 함께 김 당선자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만큼 김 당선자를 아낀다는 증거다.

김 당선자는 청년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통해 비례대표 3번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당시에도 온라인 투표 조작 등 부정 선거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김 당선자는 지난 3월 MBC '100분 토론'에 나와 "(의혹을) 제기한 부분이 사실로 밝혀지면 당연히 그렇게 (사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일부 부정이 확인됐음에도 김 당선자 측은 "당에서 결정한 다음에 생각할 일"이라며 사퇴 의사가 없음을 시사했다.

대구 출신인 김 당선자는 대일외고와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했다. 김 당선자는 한국외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할 때 구 민주노동당 출신 당권파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김 당선자는 민주노동당 중앙대의원과 부대변인, 등록금 특별위원회 집행위원과 비정규직 철폐 운동본부 집행위원 등을 거치며 당의 간판급으로 성장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