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대폰 블랙리스트 제도의 허와 실

이달초부터 시행 어디서나 휴대폰 구입 가능
외국 제조사 국내 진출 용이… 이통사 유통과정 권한 축소
합리적인 요금제 출시 기대

단말기 출고가 안정화… 요금제 약정할인 차별금지
중고폰·저가시장 확대… 정부·소비자 적극적 관심
블랙리스트제 성패 가름

아차 싶었다. 졸린 눈으로 세수하려고 허리를 굽힌 게 화근이었다. 셔츠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가 세면대로 떨어졌다. 밤을 꼬박 새운 김 팀장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올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다급해진 그는 허겁지겁 사무실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달렸다. 휴대전화를 사서 유심 칩을 갈아 끼웠다. 전원이 켜지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블랙리스트가 김 팀장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1일부터 휴대폰 블랙리스트 제도가 시행됐다. 개방형 식별번호(IMEI) 관리제도 혹은 단말기 자급제도로 불리는 블랙리스트 제도에 따라 앞으론 백화점과 마트, 편의점에서도 휴대전화를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통신사와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는 정부. 이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제조사까지 눈치싸움만 치열하다. 소비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까? 포춘코리아는 휴대폰 블랙리스트 제도의 허와 실을 분석해 5월호에서 다뤘다.

실패한 '화이트리스트제'

방통위의 블랙리스트 제도는 통신사와 제조사의 적극적인 참여 여부에 성패가 달려 있다. 서울 세종로 KT 광화문사옥 입구에는 방통위와 KT의 유무선 통합 브랜드 올레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동안 이동통신사는 승인된 휴대전화만 유통했다. 폐쇄형 식별 번호 관리제도는 화이트 리스트 제도로 불렸다. 이동통신사에 고유번호가 등록된 휴대전화만 개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용할 수 없는 단말기가 많았고 외국에서 사용하던 휴대전화도 한국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블랙리스트 제도는 이동통신사가 분실이나 도난 신고를 받은 휴대전화, 즉 블랙리스트에 오른 휴대전화가 아니라면 개통해줘야 한다는 뜻으로 폐쇄형 식별 번호 관리제도 화이트 리스트 제도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앞으론 미리 개통해놓은 가입자 식별카드(USIM칩)를 꼽기만 하면 등록 절차 없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5월부터 전자제품을 구입하듯 가전 대리점이나 대형마트, 인터넷 오픈마켓에서도 휴대폰을 구입할 수 있다. 이동통신사를 거치지 않고도 휴대전화를 구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SK텔레콤과 올레KT LG U+는 그동안 제조사인 삼성전자, LG전자, 애플 등에서 구입한 휴대전화를 요금제와 결합시켜 소비자에게 팔아왔다. 휴대전화 가격과 통신 요금이 패키지로 팔렸다. 이동통신 3사는 각자 판매 장려금과 요금 할인 등을 내걸고 마케팅에 앞장서 통신요금 체계는 이통사만 알 수 있는 난수표처럼 여겨졌다. 화이트 리스트 제도가 공급자 중심의 통신 시장을 만들어왔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화이트 리스트 제도 아래에선 단말기 등록 권한이 있는 이통사 영향력이 막강했다. 휴대전화 제조사는 이통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아이폰이 해외 출시 3년 만에 한국에 출시된 배경에도 화이트 리스트 제도가 있었다. 단말기 제조사의 한 관계자는 "제조사가 단말기 공급가를 높게 책정하는 데에도 이통사는 상당히 영향을 행사했다"면서 "출고가가 높아야 소비자가 부담을 느끼게 되고 이통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보조금과 지원금 혜택에 매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고 귀띔했다. 요금 및 단말기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요금제 약정이 필수. 이통사는 약정을 통해 꾸준한 수입원을 확보해왔지만 소비자는 2년 혹은 3년짜리 약정에 묶여왔다.

통신비 절감으로 이어질까

화이트리스트 제도는 외국산 휴대폰의 국내 진입에 큰 걸림돌이 돼왔다. 아이폰 역시 그런 이유로 국내 도입에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동통신사는 화이트 리스트 제도를 통해 휴대전화 판매를 독점함으로써 입맛에 맞는 통신요금을 소비자에게 강요할 수 있었다. 블랙리스트 제도를 통해 휴대전화와 통신요금을 분리하면 제조사의 판매 경쟁으로 출고가에 낀 가격 거품이 사라져 휴대전화 가격이 떨어질 수 있는 셈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블랙리스트 제도를 도입한 이유다.

방통위 통신이용제도과 최성호 과장은 "다양한 단말기를 접하기 어렵고 가입자의 이동성이 제한되는 문제들도 있어 블랙리스트 제도를 도입하게 됐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시행되면 휴대폰 단말기 간 경쟁이 일어나고 저가형 단말기가 많이 보급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에서 유독 움츠렸던 모토로라, 소니에릭슨, HTC 등 외국 제조사는 블랙리스트 제도가 시행되자 총판 개념의 대리점 확보를 노리고 있다. 화웨이, ZTE 등 중국 제조사도 마찬가지다. 외국 제조사가 한국 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셈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 제조사는 자체 유통망까지 구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내 시장 진입을 꾸준히 준비해왔던 화웨이는 저가 스마트폰을 앞세워 한국 시장 진출을 노린다. 그동안 외국 제조사들은 국내 이동통신사와 관계가 가깝지 않아 유통망을 갖추기 어려웠다. 까다로운 화이트 리스트 등록절차를 통과하더라도 보조금과 지원금 혜택을 받지 못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 국내 제조사가 스마트폰 판매량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국내 시장은 철옹성에 가까웠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면 이동통신사 권한이 줄어들게 된다. 외국 휴대전화가 저렴한 가격에 들어오면 소비자에겐 선택의 폭이 늘어나게 된다. 또 가계 통신비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약정 부담에서 벗어난 소비자가 자유롭게 통신사를 선택하면 통신사 사이에 가격 경쟁이 생겨 합리적인 서비스와 요금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한국사이버대학교 컴퓨터정보통신학과 곽동수 교수는 "4인 가족이 한 명당 통신비로 한 달에 3만 원씩만 써도 12만 원이 든다. 인터넷 요금까지 더해지면 최소 매달 1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발생한다"면서 "현 정부가 내세운 공약 중 하나가 가계 통신비 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었지만 아직 통신비가 줄어들지 않아서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제조사·통신사 참여 관건

블랙리스트 제도가 통신비를 낮추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한 휴대전화 매장. 직원은 "100만원짜리 휴대폰을 그냥 제값 다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기기값을 다 주나요? 통신사에서 사면 최소 30만 원 이상 싸게 살 수 있는데"라고 말했다. 휴대전화 가격에서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면 블랙리스트 제도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자리를 잡으려면 제조사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 단말기 가격에 거품이 사라지면 통신사가 휴대전화 판매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면 휴대전화 자급제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예상했던 대로 통신사는 블랙리스트 제도를 통해 휴대전화를 직접 구입한 소비자에게 약정 할인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 자세에 눈치를 봤는지 구입경로와 상관없이 일정기간 사용을 약정하면 동일한 요금할인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SK텔레콤은 다음달 1일부터 3세대 이동통신(3G) 가입자에게 약 30%, 4세대 이동통신(LTE) 가입자에게 약 25% 할인율을 적용할 계획이다. LG U+는 3정액 요금제 가입자에게 약 35%, LTE 정액요금제 가입자에게 약 25%를 깎아줄 생각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6월부터 휴대전화 제조사가 자급제용 휴대폰을 본격 공급하면 하반기에는 통신 요금 인하 효과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일단 휴대전화 제조사는 통신사와 정부 눈치를 살피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은 이통사를 통해 구입하는 것보다 출고가를 낮게 책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통신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동안 통신사와 안정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블랙리스트 제도를 활용하려다 소탐대실할 수 있다. 결국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블랙리스트 제도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제조사는 재고 휴대전화와 중저가 단말기 가격을 낮출 순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그러나 포춘코리아는 아이폰과 갤럭시노트처럼 고가 스마트폰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가 저가 휴대폰을 직접 구매하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9년째 휴대전화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윤지용씨는 "휴대폰은 한국이 세계 최고라는 인식이 많다. 아이폰 정도를 제외하곤 해외 휴대폰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기술 적응력이 뛰어난 소비자들은 단말기 가격이 낮을수록 오히려 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한 정부·똑똑한 소비자

SK텔레콤, 올레KT, LG U+가 3등분하고 있는 통신시장에서 휴대전화 제조사가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통신사가 기득권을 포기할 리가 없는 상황에서 결국 정부와 소비자가 블랙리스트 제도를 활성화시킬 수밖에 없다. 정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소비자는 좀 더 똑똑하게 이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

한국소비자연맹 관계자는 "블랙리스트 제도의 성공 여부는 정부의 역할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통사와 제조사를 움직일 유인책을 고민하면서 소비자 편익도 고려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빈 단말기에도 통신요금 인하 혜택을 주도록 이통사를 강제하고, 일반 유통점에도 이통사 대리점 공급가격으로 단말기를 제공하도록 제조사를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통위의 관계자는 "이 제도가 도입된다고 해서 현재 유통체제가 완전히 바뀌는 건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채널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다. 기존 유통망에 경쟁체제를 붙이다. 제도가 시행된 후 최소 1년 이상은 결과를 기다려 봐야 한다. 적극적인 개입 여부는 그때 가서 판단하면 된다. 통신비 절감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 정부도 제도 시행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통신비를 당장 낮추진 못하더라도 중고폰 시장을 활성화시킬 걸로 보인다. 약정에서 벗어나 단말기를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휴대전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한국사이버대학교 곽동수 교수는 소비자의 똑똑한 판단이 필요하다며 "미국 같은 나라에선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단말기 세일을 한다. 할인폭은 30~40% 정도로 큰데 우리나라도 이런 기회가 생길 텐데, 소비자가 잘 활용해야 이런 행사가 지속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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