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천하장사 노인상대 건강상품 판매 얼굴마담으로

천하장사 출신 이준희(55)씨 별명은 ‘모래판의 신사’였다. LG투자증권과 신창건설 씨름단 감독을 거쳐 한국씨름연맹 경기위원장을 지냈고, 의성 특산물 마늘 CF 모델과 금산세계인삼엑스포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그가 “나를 믿고 사라”고 외치자 가난한 노인들마저 지갑을 열었다. 천하장사를 앞세운 사기꾼들은 2만 2,000원짜리 건강보조식품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원가의 10배가 넘는 33만원에 팔았다.

충남 당진경찰서는 지난 14일 전국 각지에서 공짜 관광을 미끼로 노인을 모아 충남 금산에서 건강보조식품을 비싼 값에 팔아온 일당을 붙잡았다. 금산에 판매점을 차린 사기단 총책 이모씨은 사기 혐의로 구속됐고, 노인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여온 이준희씨를 비롯한 조직원 69명은 불구속 입건됐다. 당진경찰서의 수사 결과, 이들이 챙긴 부당 이익은 약 19억원이었고, 피해 노인 수는 5,000명 이상이었다.

공짜 관광의 늪

사기단의 수법은 10년전 그대로였다. 공짜 관광을 시켜준다고 노인네들을 꼬드겨 모은 뒤 ‘유명 인사’ 이준희씨를 내세워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약을 팔기 위해 노인네들을 상대로 반 협박(?)을 일삼았다면, 이번에는 ‘모래판의 신사’를 내세운 게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 반 협박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노인네들도 이준희씨를 믿고 스스로 지갑을 연 것이다.

사기단의 거점은 인삼 산지로 유명한 금산에 마련됐다. 총책인 이씨는 영업이 중단된 허름한 예식장 건물에 건강보조식품 판매점을 차렸고, 이준희씨 등을 모집책과 판매책으로 나눠 조직적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우선 모집책은 전국 각지 노인을 판매점으로 유인했다. “안녕하세요. ○○시청인데요. 어르신들께 육영수 여사 생가를 공짜로 구경시켜 드릴게요.” 이들은 시청과 구청, 사회복지센터 직원으로 행세하며 노인정이나 노인복지회관, 마을회관에 전화를 걸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노인들은 관광과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이런 방법으로 노인을 모은 모집책은 공짜로 관광과 식사까지 제공한 다음 금산에 있는 판매점으로 데리고 갔다.

노인들이 판매점에 들어서면 판매책이 현란한 말솜씨를 발휘했다. 강사들은 “이거 3개월 먹고 간경화(를) 치료했어”라고 말하며 2만원대 건강보조식품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선전했다. 신경통ㆍ당뇨병ㆍ중풍에 특효약이라고 떠드니 노인들은 귀가 솔깃할 수밖에. 노인들이 망설이면 이준희씨가 등장해 “천하장사를 지낸 내가 먹고 효과를 봤다”고 꾀었다.

공짜 관광과 식사 제공을 미끼로 노인을 모아 건강보조식품을 비싼 값에 파는 사기 수법은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노인들도 공짜 관광에 이은 약 판매에는 경각심이 높아진 상태. 그러나 이준희씨가 천하장사라는 유명세를 이용해 노인들의 경각심을 푼 뒤 판매책이 망설이는 노인들에게 “죽으면 돈을 싸가지고 (저승에)갈 것이냐”며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이준희씨도 피해자?

‘모래판의 신사’로 유명한 이준희씨는 2008년부터 금산에 있는 인삼 유통업체 부사장으로 일하며 ‘인삼 알리미’ 역할을 맡았다. 이씨는 2009년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인삼은 약 종류라 식품법 등 숙지해야 할 게 너무 많고 복잡하다”며 “손님들이 오면 인삼 효능을 설명하며 분위기를 잡아주는데 주력한다”고 근황을 소개했다. 이번에 적발된 업체 판매총책 이모씨를 만난 시점도 2009년이었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도 이용을 당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들에게 사장으로 소개됐던 이씨는 “해당 회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사장이 하라는 대로 해줬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씨는 판매 과정에서 “어르신 몸에 정말 좋은 약이다” “천하장사를 지낸 내가 먹고 효과를 봤다” “제약사에서 만든 제품이니 믿고 사도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들은 대부분 정에 굶주려 작은 호의에도 현혹되고 질병으로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고 싶어한다”면서 “구매를 망설이던 노인들은 이씨가 등장하면 (약을)신뢰할 수 있게 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래판의 신사가 속칭 ‘바지 사장’으로 일하면서 받은 대가는 월급 400만원. 월급과 별도로 제품을 하나씩 팔 때마다 5,000원씩 받았다. 당진경찰서는 이씨가 1월~3월 바지 사장 역할로 약 2,300만원을 챙겼다고 밝혔다.

경찰은 피해자 가운데 대다수가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기초생활급여와 기초노령연금을 받아 할부금을 갚느라 생활고에 허덕였고, 과도한 할부금은 가정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성분 검사를 의뢰한 당진경찰서는 “적극적인 수사와 홍보로 비슷한 피해를 막아야 한다”면서 수사를 확대해 비슷한 수법으로 폭리를 얻는 업체들을 적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진경찰서는 총책 이씨와 함께 이준희씨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이준희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피해를 본 분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