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제일비료 회장 이맹희씨 측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한 유산소송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준비서면 제출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소송 전 모든 과정이 일단락되면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첫 공판에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유산소송의 쟁점은 이맹희씨 측이 인도를 요구한 주식이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유산으로 남긴 상속재산인지 여부와 이에따른 제척기간의 도과 여부다. 한편 이 회장 측이 소송을 위해 제출한 준비서면의 내용이 대략적으로나마 공개되며 2008년 삼성특검 당시 문제가 됐던 이 회장의 비자금 규모와 이것이 소송의 변수가 될 것인가도 관심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첫 공판만 남겨둬

삼성가의 유산소송은 지난 2월 12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씨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 등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맹희씨는 "부친이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ㆍ소유하던 재산을 이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단독명의로 변경했다"고 소송이유를 밝혔다.

2주 후인 28일 고 이 창업주의 차녀이자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씨도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3월 28일에는 고 이 창업주의 차남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의 며느리 최선희씨와 아들 준호, 성호군마저 소송전에 참여했다.

3월 16일 이맹희ㆍ이숙희씨 측(이하 '이씨 측')은 법원에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이하 '삼성특검') 수사기록에 대한 증거조사 신청을 했다. 이씨 측이 낸 증거조사 신청에 대해 이 회장 측이 답변서를 제출한 것은 3월 23일이었다. 이 회장 측은 서울중앙지법에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고 소송 비용을 원고가 부담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답변서를 냈다. 이씨 측의 주장을 전면 부정한 셈이다. 소송 확대를 위해 제기한 증거조사 신청에 대해서는 "의견서를 제출할 때까지 결정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의 장외 설전이 격화되던 지난 4월 말 이 회장 측은 소송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이 회장 측 준비서면에는 이맹희씨가 상속을 청구할 수 있는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등 차명주식 반환요청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5일 이씨 측도 준비서면을 제출, 공판날짜만을 기다리게 됐다. 이씨 측의 준비서면에는 "이 회장이 차명주식을 본인 명의로 전환한 것은 2008년 12월이기 때문에 법률상 제척기간 10년을 지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제척기간 지났나?

삼성가 유산소송의 최대 쟁점은 상속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인 '제척기간'이다. 제척기간은 소멸시효와 비슷한 개념으로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은 침해사실을 인지한 날부터 3년, 상속권의 침해행위가 있었던 날부터 10년을 경과하면 소멸된다.

이 회장 측은 "2008년 4월 삼성특검 수사 발표로 고 이 창업주가 남긴 차명재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국내외 언론에 공개됐으므로 이씨 측도 차명재산의 존재 여부를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 회장 측이 제시한 기준에 따르면 2011년 4월이면 제척기간 시효가 완료된다. 그동안 잠잠했던 이 회장이 지난해 6월에야 소명 문서를 보낸 것도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읽힌다.

이씨 측은 이 회장이 소명 문서를 보낸 이후에야 비로소 차명재산의 존재 여부를 인지할 수 있었다고 반박한다. 이씨 측의 기준대로라면 3년의 제척기간은 아직 지나지 않아 상속회복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양측은 상속권의 침해행위 발생시점에 대해서도 팽팽한 대립을 하고 있다. 이씨 측은 차명재산을 이 회장이 자신의 명의로 전환한 날을 침해행위가 발생한 시기로 보고 있는데 반해 이 회장 측은 고 이 창업주가 작고한 1987년을 해당 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단순 계산해보면 이씨 측은 3년 전인 2009년 2월을, 이 회장 측은 25년 전인 1987년을 침해행위 발생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삼성특검 비자금 재조명

단순히 소송의 승패만을 놓고 본다면 이건희 회장 측이 유리하다. 최대 쟁점인 두 건의 제척기간(침해를 인지한 날로부터 3년, 침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중 하나만 지나도 현행법상 상속회복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데 이씨 측은 이를 모두 입증해야 하는 반면 이 회장 측은 어느 하나만 충족시켜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무법인 화우가 소송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이씨 측과 함께 첫 공판으로 이어지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나선 데는 승산에 기대 때문이다. 물론 법리적인 문제가 최대 쟁점이지만 일각에서는 삼성특검 당시 문제가 됐던 이 회장 비자금이 재조명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삼성의 심리도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2008년 특검 당시 흐지부지 덮였던 이 회장 비자금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오르기 전에 삼성에서 일종의 협상안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지난 3월 이씨 측이 법원에 삼성특검 수사기록에 대한 증거조사 신청을 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이씨 측이 증거신청한 자료는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상속 재산에 대한 계좌추적 및 차명재산의 관리ㆍ처분에 관한 자료 ▲고 이병철 회장의 타계 후 상속 재산 및 상속세 신고 납부자료 ▲상속 대상 주식의 실명 전환 및 처분 관련 세금 납부자료 ▲이병철 회장 타계 후 이건희 회장이 취득ㆍ처분한 삼성생명, 삼성전자 주식의 예탁관리 현황과 명의변경 신청 자료 및 이액배당금 지급시기와 내역 관련 자료 등이었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 측의 증거조사 신청 내용을 확인한 이 회장 측은 상당히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자칫하면 삼성특검 당시 이 회장 비자금 문제가 다시 부상할 수 있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를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 측은 이에 대한 답변서를 통해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이에 관한 입장을 밝히겠다고 요청하며 시간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지난 4월 말 이 회장 측이 준비서면을 제출하며 논란거리가 될만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준비서면에는 고 이병철 창업주가 물려준 삼성전자 주식은 이미 처분했고 차명으로 보유하던 225만여 주는 이 회장이 별도로 사뒀던 주식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자금의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자금원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 회장 쪽은 선대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재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삼성특검 수사결과와 충돌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다.

그러나 이 회장 본인의 소득으로 다시 샀다는 225만여 주의 삼성전자 주식을 왜 차명 보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이 없는데다 말 바꾸기에 대한 비난여론이 커지며 오히려 비자금 논란 불씨가 재점화됐다. 논란이 커지자 이인용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의 경우 선대회장이 물려준 형태 그대로 남아있는 게 없고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주식 명의인이 모두 변경됐다는 의미"라고 급히 입장을 표명했다. 혹시라도 있을 삼성특검 재조사 여론을 잠재우기 위함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씨 측이 지속적으로 삼성특검 문제를 거론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삼성특검 재조사라는 더 큰 문제를 막기 위해 유산소송에서 상당 부분 양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래전에 묵혀뒀던 이 회장의 아킬레스건 삼성특검을 겨냥한 이씨 측의 노림수가 삼성가 유산소송의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주목되는 이유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