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 상속소송전이 마침내 시작됐다. 최소 소송가 1조원의 대형 재판인 만큼 지난달 30일 열린 첫 공판에는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첫 공판인 만큼 어느 한 쪽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쟁점이 부각되며 추후 있을 치열한 승부를 예고했다.

관심 속에 치러진 첫 공판

지난달 30일 오후 4시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558 호에서는 전 제일비료 회장 이맹희씨 등 삼성가 일부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인도청구소송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재계 1위 삼성가의 재산을 놓고 벌인 첫 공판이니만큼 전 국민의 이목은 재판장에 쏠렸다. 이 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공판 시작 30분 전부터 50여 명이 넘는 취재진이 법정으로 모여들었다.

공판이 진행된 558호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변론이 진행되는 방 중 가장 큰 규모다. 그럼에도 삼성과 CJ관계자들, 취재진, 방청객들은 방청석은 물론 좌우통로와 심지어 문 밖까지 장사진을 이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2부(서창원 부장판사) 재판부는 "방청을 편안히 할 수 있도록 여러 방안을 강구했지만 사용할 수 있는 법정 가운데 이곳이 가장 큰 곳"이라며 방청객들의 양해를 구했다.

이날 열린 공판에는 이 회장, 이씨 등 당사자들은 불참했다. 대신 양측의 법률대리인인 변호사들이 출석, 공판을 진행했다. 이 회장 측에선 법무법인 태평양, 세종 등에 소속된 변호사 6명이, 이씨 측에선 법무법인 화우 소속 변호사 9명이 총출동해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씨 측이 이 회장 측을 상대로 청구한 주식은 시가로 1조원 정도다. 그러나 공판이 진행되면서 청구가 확장, 총 소송가는 3조원 이상으로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소송규모가 큰 만큼 재판부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서창원 부장판사는 "재판을 앞두고 사건이 커지면서 고민이 많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서 부장판사는 "그동안 많은 언론 보도가 나왔고 원고와 피고 측에서 한 차례씩 전화를 받았지만 재판부는 모든 변론절차를 서면으로만 진행하고 이 법정 내의 것만 인정하겠다"며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서이니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방식의 변론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서 판사는 또 "본 재판을 위해 많이 준비했지만 법관도 사람이고 파악 못한 미진한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며 "신중을 기해서 결정을 내릴 테니 존중해달라"고 덧붙였다.

차명주식도 경영권에 포함되나?

공판 전 제출한 준비서면을 통해 서로의 주장을 피력했음에도 이건희 회장 측과 이맹희씨 측은 첫 공판에서부터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신중한 결정을 위해 법리 공방을 먼저 하고, 증거조사를 하겠다는 재판부의 입장에 따라 첫 공판은 양측이 제출한 준비서면에 담긴 주요 사안들의 법리 공방에 초점이 맞춰졌다.

쟁점은 ▲이 회장에 대한 이병철 창업주의 '경영권 승계의사'에 차명주식이 포함되는지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除斥期間: 법률상으로 정해진 존속기간)이 경과했는지 ▲이 창업주로부터 이 회장이 물려받은 차명주식의 '변환물'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이었다.

먼저 차명주식 여부와 관련해 이 회장 측은 이 창업주가 이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때 함께 물려준 재산이어서 분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이씨 측은 차명주식까지 물려준 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회장 측은 "이병철 회장이 경영권 승계의사를 밝힐 때는 당연히 그 경영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주식의 승계의사까지 포함한 것"이라며 "이병철 회장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차명주식 등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주식은 회장 비서실에서 이건희 회장 소유 재산과 함께 관리하도록 조치함으로써 그 재산들이 모두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에게 단독 상속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 측은 "이건희 회장은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에게 기명주식을 상속받았고 그것만으로도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며 "이건희 회장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 없는 차명주식의 존재를 다른 공동상속인들에게 철저히 숨겨왔다"고 반론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낸 주식인도 소송 첫 공판이 5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공판을 마치고 이맹희 전 회장 측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화우의 김대휘(맨 왼쪽) 변호사가 취재진의 질문을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 회장 측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차명주식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의 단독상속 여부를 문제삼는 것은 이 회장을 그룹의 공식 후계자로 지목한 이병철 선대회장의 뜻을 부인하는 행위"라며 "이건희 회장의 노력으로 커진 회사의 지분을 25년이 지난 현재의 가치대로 다시 나누어 가지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에 이씨 측은 "피고(이건희 회장) 측은 마치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주식을 원고들(이맹희씨 측)이 빼앗으려 한다며 도덕성을 문제삼고 있다"며 "이맹희씨 등은 부당하게 침해된 권리를 찾으려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제척기간은 지났나?

첫 공판에서 떠오른 또 하나의 쟁점은 상속회복청구권이 존속하는 제척기간의 경과 여부다. 이건희 회장 측은 상속재산 분할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이미 지났다는 입장이고 이맹희씨 측은 뒤늦게 알았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주장이다.

많은 법률전문가들이 공판 이전부터 최대 승부처로 여겼던 곳이니만큼 이날 양측은 제척기간 문제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이씨 측은 "민법에 따르면 상속권의 침해사실을 안 날로부터 3년, 침해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10년이 지나야 상속권회복청구권이 소멸된다"며 "이맹희씨 등은 2011년 6월 세무 문제 때문에 이건희 회장이 동의서를 요구할 때 알았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삼성 특검 수사 발표 내용 가지고는 상속재산의 내용을 이맹희씨 등이 알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씨 측은 또 "이건희 회장은 차명주식을 은닉ㆍ관리하면서 상속명의를 변경한 적이 없어 엄밀히 말해 상속권 침해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다"며 "그렇게 되면 제척기간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씨 측의 주장에 대해 이회장측은 '부적합하고 일방적인 논리'라고 반박했다. 이 회장 측은 "이병철 선대회장은 생전에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정하고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겠다고 밝혔다"며 "상속인이 주식 인도에 모두 동의한 상황에서 제척기간이 지난 지금 상속권을 주장하는 것은 명분도 없고 부적법하다"고 반론을 폈다.

차명주식의 변환물은 어떻게 봐야

공판에서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한 마지막 쟁점은 차명주식 변환물의 존재 여부였다. 이 회장 측은 반환소송의 대상인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 주식이 상속재산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이씨 측은 변환물의 형태로 차명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 회장 측은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차명주식은 특검 조사 당시 밝혀진 바와 같이 이미 처분됐고 원고가 돌려달라고 하는 주식은 이 회장이 배당금 등으로 매매 또는 유상증자를 통해 새로 취득한 주식"이라며 "단독 상속한 주식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음을 전제로 하는 이번 소송은 각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씨 측은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은 차명주식을 다른 것으로 팔아서 변환물이 됐다면 그에 대한 추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에 재판부는 "변환물의 존재 여부에 대한 법리공방도 필요한 상태"라며 "목적물이 특정되지 않으면 제척기간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재판부는 이 회장 측에 고 이병철 창업주의 사망시점인 1987년 당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주권발행 여부를 밝힐 수 있는 법인등기부, 주권발행명부 등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팽팽한 승부, 유리한 쪽은?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삼성가 상속소송의 첫 공판이 끝나고 난 뒤 법률전문가들은 "예상했던 대로 진행됐다"고 평했다. 첫 공판치고는 많은 공방이 있었지만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데다 대부분 서면으로 제기됐던 주장이라 이미 대응준비를 마친 상대방을 압도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내용이다.

앞으로의 소송 진행방향에 대해서는 제척기간 경과 부분에서 승기를 잡는 쪽이 전체 재판을 좌우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누가 우세한 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양측 모두 결국 마지막까지 가야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국내 주요대학 로스쿨에서 친족상속법이 속한 민법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결국 제척기간의 경과 여부가 본 소송을 좌우하고 있다"며 "통상적으로는 상속권 침해 행위는 원래 소유자의 사망으로 침해를 안 날은 명의이전 시점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제척기간의 경과로 이건희 회장 측이 유리하다.

LG 계열사 법무팀에서 재직 중인 한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 측의 주장대로 삼성 특검 때 상속재산에 대해 인지할 수도 있겠지만 (특검 관련) 보고서가 너무 소략한 것은 이 회장 측에게 불리하다"며 "그에 반해 이건희 회장이 이맹희씨 등에게 보낸 동의서는 확실한 증거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고 전했다. 확실한 증거로 작용할 수 있는 동의서가 지난해 6월 보내졌음을 감안한다면 이씨 측이 유리해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제척기간 경과 여부를 좌우할 수 있을만한 흥미로운 변수가 또 하나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이맹희씨의 측근이라고 밝힌 관계자는 "삼성 특검 당시 이맹희씨는 중국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때"라며 "국내에서는 떠들썩했던 사건이지만 중국에 있던 이씨는 아예 상속재산 여부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주장이 입증된다면 제척기간의 경과 여부에서 이씨 측은 이 회장 측보다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해 이 회장 측에서 동의서를 보낼 당시 삼성 관계자는 이씨의 정확한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해 결국 해당 문서를 CJ 재무팀장에게 맡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정황도 이씨 측에게 유리해 보인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