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승만(제헌국회), 이기붕(3대), 박준규(13~15대), 임채정(17대), 박희태(18대)
1948년에 개원한 제헌국회부터 지난달 29일 문을 닫은 18대 국회까지, 대한민국 삼권(三權)의 한 축인 국회의장은 모두 21명 배출됐다. 국회의장은 대통령 대법원장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인 중 1명이다.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19대 전반기 국회 의사봉은 새누리당 6선 중진인 강창희(66) 의원이 쥐었다. 지난 1일 당내 경선에서 정의화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린 강 의원은 사실상 19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확정됐다.

국회의장은 국가 3대 요직 중 한 자리인 만큼 잠시도 비워둘 수 없다. 따라서 궐위 시 지체 없이 보궐선거를 실시한다. 지난 2월 9일 박희태 의장이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하자 국회는 2주 만에 18대 부의장이었던 정의화 새누리당 의원을 의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했다.

국회의장의 임기는 2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연임을 통해 그 이상 의사봉을 잡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정확하게 2년의 임기만 수행하는 게 관례로 자리잡았다. 단 보궐선거를 통해 의장이 된 경우에는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채우게 된다.

대통령에 버금가는 자리

국회의장은 말 그대로 국회의 수장이자 최고봉이다. 300명이나 되는 '작은 대통령'들의 대표가 국회의장이다. 명예로 따지면 국회의장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자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 의전 서열 '넘버 2'인 국회의장은 차관급 의장비서실장을 포함해 비서진 20여 명을 둘 수 있다. 정무수석 정책수석 대변인 등 1급 비서관만 2명, 정무 정무기획 연설 등 2급 비서관 6명, 서울 한남동 의장공관장을 비롯한 3급 비서관 3명 등 고위직만 12명에 이른다. 또 국회의장에게는 국회의원 세비(약 1억5,000만원) 외에 업무추진비로만 연간 13억원이 책정된다.

국회의장의 권한은 ▲국회 대표권 ▲의사 정리권 ▲질서 유지권 ▲사무 감독권 등 크게 4가지로 나뉜다.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대외적으로 국회를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국회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합ㆍ조정 역할을 한다.

국회의장이 행사할 수 있는 입법 권한은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을 정부에 넘긴다. 이 법률안을 대통령이 5일 이내에 공포하지 않으면 국회의장 임의로 법을 공포할 수도 있다.

국회의장은 헌법재판소장, 법원장, 감사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 정부 주요 관계자들을 국회에 출석시킬 수 있다.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대통령 못지않은 자리이지만, 19대 국회에서는 의장의 '파워'가 많이 떨어졌다. 가장 막강한 권력이던 '직권상정' 제도가 사실상 폐지됐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에서는 전시 사변 등 국가비상사태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의장이 직권상정할 수 없도록 법을 바꿨다. 각 교섭단체의 대표 간 합의가 전제돼야 직권상정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연말에 대선이 있는 만큼 특정 세력의 일방통행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이다.

박준규는 9선, 임채정은 4선

지난 18대까지 총 21명의 국회의장 중 최장수 의장은 6, 7대 때 이효상 전 의장이다. 이 전 의장의 임기는 무려 7년 6개월 14일로 '평범한' 의장보다 3배 이상 기간 동안 의사봉을 쥐고 있었다.

9대 때 정일권 전 의장과 3, 4대 때 이기붕 전 의장도 각각 6년과 5년 11개월 동안 국회의장직을 수행했다.

이승만 제헌국회 의장은 최단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전 의장은 1948년 5월 31일부터 같은 해 7월 24일까지 55일간만 의사봉을 잡았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역대 대통령 중 국회의장까지 '2관왕' 타이틀을 갖고 있는 인물은 이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이 전 대통령에 이어 1, 2대 국회의 수장에 오른 신익희 전 의장은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와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국회의장 중에는 국무총리나 장관 등 요직을 거친 이들이 상당수 있다. 8, 10대의 백두진 전 의장과 9대 정일권 전 의장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이기붕 전 의장은 서울시장과 국방장관을 지냈다.

국회의장은 대부분 민간인 출신이나 군인 정치가로 의장에 오른 경우는 9대 정일권 전 의장, 11대 정래혁 전 의장, 최근 19대 국회 전반기 의장에 내정된 강창희 의원 등이 있다.

국회의장을 배출한 지역을 살펴보면 영남이 9명(부산 경남 5명, 대구 경북 4명)으로 1위를 차지한 가운데 호남이 4명, 서울 경기 3명, 평양 평북 함북이 각 1명이었다. 강창희 의원의 19대 전반기 의장에 등극함에 따라 충청은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장을 배출하는 영예를 안게 됐다.

국회의장은 당을 대표할 만한 중진이나 원로가 맡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선수(選數)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 13~15대 의장을 역임했던 박준규 전 의장(5~10대, 13~15대)은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함께 역대 최다선(9선) 공동 챔피언이다.

반면 참여정부 후반기였던 17대 국회 의장에 올랐던 임채정 전 의장은 4선에 불과했다. 4선은 국회부의장이 되기에도 버거운 선수다. 임 전 의장이 세운 '4선 국회의장'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워 보인다.

박희태는 5번째 불명예

이명박 대통령,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등과 함께 현정권 6인회 멤버의 일원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지난 2월 9일 전격 사퇴했다.

2008년 전당대회 때 돈봉투 사건이 불거진 게 직접적인 이유였다. 박 전 의장은 역대 5번째, 비리나 부패사건에 연루된 경우로는 불명예 퇴진 1호를 기록했다.

박 전 의장은 지난 4일에는 서울중앙지법 결심공판에서 검찰에서 징역 1년 형을 구형 받았다. 검찰은 "정당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당내 선거에서 부정행위를 근절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고 구형 이유를 설명했다.

박 전 의장에 앞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의장은 모두 4명이 있었다. 이승만 전 의장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의장직을 내놓았던 만큼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었다.

1960년 4대 국회 때는 이기붕 의장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같은 해 4ㆍ19 혁명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자, 4월 26일 이 전 의장의 장남이 부모와 동생 등을 권총으로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79년 10대 국회 때는 백두진 전 의장이 도중하차했다. 1971년 7월 8대 의장에 선출된 뒤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기 전까지 1년 3개월 간 의장을 맡았던 백 전 의장은 1979년 2월 다시 국회 최고봉에 올랐다. 그러나 10ㆍ26 사태가 발발하자 백 전 의장은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민관식 부의장이 직무대행을 맡았다.

1990년 13대 국회 때 의장에 선출됐던 박준규 전 의장은 1992년 14대 국회 때도 의사봉을 잡았다. 하지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재산 공개 파동에 휘말렸던 박 전 의장은 중도 낙마의 쓴맛을 봐야 했다.

박 전 의장은 그러나 15대 총선 때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당선된 뒤 1998년 국회의장에 복귀하면서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현역 2번째 다선의원 친박의 좌장 군부 출신 꼬리표 부담
■ 강창희는 누구?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사실상 결정된 강창희 의장은 당내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인 정몽준 의원(7선)에 이어 현역 의원 중 2번째 최다선이다. 강 의장의 정치적 성향은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가까운 친박계다.

군 출신인 강 의장은 원칙과 소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평을 듣는다. 육사 25기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14년 후배인 강 의장은 1980년 군사정권 출범을 앞두고 예편한 뒤 민정당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전국구 의원(현 비례대표) 자격으로 제11대 국회에 입성했다. 강 의장에게 군부 출신이라는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붙는 이유다. 강 의장은 지금까지도 이따금 전력 때문에 공격을 받는다.

강 의장은 13대 때 지역구에서 낙선했지만 16대까지 5선을 기록했고, 과학기술부 장관,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 정치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강 의장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으로 옮긴 이후로도 부총재,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16대 총선 후 자유민주연합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기 위해 김종필 총재가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온' 것에 반발하다 끝내 제명됐다.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한 강 의장은 부총재, 최고위원, 대전시당위원장을 거쳤다. 17, 18대 때 연거푸 고배를 들었던 강 의장이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지난 4ㆍ11 총선에서 보란 듯이 승리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강 의장은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캠프에 고문으로 합류하며 친박 대열에 합류했고, 이후 명실상부한 충청권 친박의 좌장으로 물심양면 박 전 위원장을 지원했다.

4ㆍ11 총선 직후만 해도 '강창희=당대표, 황우여=국회의장'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듯했으나, 대선 등 경우의 수가 고려된 끝에 '강창희=국회의장, 황우여=당대표'로 역할이 뒤바뀌었다.

강 의장은 지난 1일 사실상 국회의장으로 결정된 뒤 "여당에게는 한 번 묻고, 야당에게는 두 번 묻고, 국민에게는 세 번 물어서 각계의 지혜를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