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랭은 팝 아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소비되는 촉매제 노릇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중의 소비문화 꿰뚫는 '팝아트'서 모색해야
자사이미지 노출 주력 기존의 홍보 방식서 탈피
작가가 기획부터 참여새로운 이미지 재창조
루이비통 무라카미백 제품 직접 드러내지 않고
작가+작품만 홍보 현대카드 '월드스타 콘서트'
대중 눈높이 만족시켜야 글로벌 기업 추월 가능


애플이 선도하고 있는 디자인 경영을 따라잡기에 한국 기업들은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포춘코리아는 대중의 소비문화를 꿰뚫고 있는 팝 아트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에서 6월호에 게재한 특집 기사를 통해 디자인 경영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아트 마케팅 전략에 대해 면밀히 분석했다.

애플과 휴대전화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삼성전자도 아트 마케팅을 앞세워 갤럭시 노트를 판매하고 있다. 제일기획 황정제 프로는 "갤럭시 노트의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럴 땐 아트도 중요한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갤럭시 노트는 지난해 삼성전자가 야심 차게 선보인 모바일 기기.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동시에 공략하기 위한 전략상품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최대 크기인 5.3인치 화면을 선택했다. 휴대폰과 태블릿 PC의 중간 크기라서 어정쩡하다는 혹평도 받았다. 그러나 S펜으로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크기에 대한 거부감을 호감으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4월에 '갤럭시 노트 아트 페어 Wish Note'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팝 아티스트 6명이 참여해 자신의 예술작품을 직접 갤럭시 노트의 S펜으로 선보였다. S펜은 갤럭시 노트만의 차별화된 기능 중에 하나다. S펜 하나만 있으면 자신의 감성을 그림이나 문자로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 황정제 프로는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일에 중점을 뒀습니다. 팝 아트만큼 예술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콘텐츠도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갤럭시 노트 아트페어에 참가한 팝 아티스트.
갤럭시 노트에 덧칠해지는 예술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삼성전자는 5월에 갤럭시 노트 창작 대전을 열었다. 일반인, 미술 전공자, 미디어아트 3개 부문으로 나눠 S펜으로 그림 솜씨를 겨루는 행사가 6월 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팝아트 1세대로 불리는 강영민 작가는 "삼성전자는 애플보다 기술적인 면에서 우월합니다. 하지만 애플의 강점은 그들만의 고유 철학과 이미지가 있다는 겁니다. 고객은 기술혁신에만 끌리는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삼성전자는 갤럭시 노트에 아트라는 감성을 입히고 있다.

기업과 아트 마케팅

포스코는 여수엑스포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옆에 기업관을 두었다. 포스코 홍보 전담 계열사 포레카의 신형우 국장은 "이번 여수엑스포에서 포스코관은 팝 아트적인 영상 표현에 승부를 걸었습니다"라면서 "포스코가 실사 영상 이미지로 기업의 메시지를 극대화할 수는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포스코관에서는 멀티미디어 쇼가 돋보인다. 관람객의 몸짓이 첨단 시스템을 통해 벽면에 천연색 대형영상으로 너울거린다.

신형우 국장은 "멀티미디어 쇼는 심오한 주제를 간결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재미있고 즐겁게 볼 수 있는 팝 아트적인 영상을 추구하게 된 이유죠. 디자인학과 교수와 영상 전문가가 공동으로 참여해 만든 작품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여수엑스포에 참가한 기업들은 저마다 팝 아트를 기업관 곳곳에 접목시켜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삼성전자는 아트 페어에 참여한 6명의 팝 아티스트의 작품을 여수까지 공수했다. 여수엑스포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해양을 주제로 한 새로운 작품을 그렸다. 주말이면 6명의 작가가 돌아가며 여수엑스포를 방문해 팝 아트의 진수를 보여준다. 삼성전자 기업관에는 전자제품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다만 갤럭시 탭과 갤럭시 노트에 팝 아티스트의 작품을 담아 액자처럼 공연장 출입구에 전시했다. 제품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전영근 작가가 기아자동차 레이를 소재로 그린 작품.
통신사인 SK텔레콤은 아예 팝 아티스트를 위한 별도의 갤러리를 마련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작품인 8폭짜리 디지털 병풍을 들여놓았다. 그림 속 사물들이 현실처럼 살아 움직이며 사람들의 발길을 붙든다. 이 작품에는 SK텔레콤의 모바일 기술이 결합됐다. 관람객이 자신의 스마트 폰으로 명화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그 작품을 다운로드 받아 소장할 수 있게 했다.

팝 아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소비문화이자 대중미술이다. 강영민 작가는 "말 그대로 팝(POP)과 아트(ART)가 결합된 거죠. 그래서 일반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여수엑스포 기업관은 기업들이 자신들만의 언어로 홍보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케팅 전장이다.

아트 마케팅 2.0

예술을 토대로 한 마케팅은 진화하고 있다. 1단계는 기업이 작가나 단체를 후원하는 아트 경영의 초기 모습이다. 기존 예술 작품을 기업 상품에 덧입혀 제품을 출시한다. 기업이 신상품을 홍보하기 위해 아트를 단순 소비하는 단계란 얘기다. 강 작가는 "기업이 아트를 소비만 하다 보니 생명력이 짧아지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작가와 함께 새로운 창조를 하게 되죠"

아트 마케팅 2단계에선 기업이 작가와 협업한다. 제품을 기획할 때 작가가 참여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한다. 1회성 소비에서 차별화된 브랜드로 진화된다는 말이다.

루이비통의 수석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일본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공동작업은 기업과 예술의 만남에서 모범이 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일명 무라카미 백으로 불리는 이 제품은 루이비통의 전통적인 디자인인 모노그램 백을 멀티컬러 라인으로 재해석해 명품 시장에서 단숨에 대박 상품이 됐다. BMW는 지난 37년 동안 앤디 워홀부터 제프쿤스까지 17명의 작가를 통해 '아트카'를 제작해 선보였다. 이미 해외에선 오래전부터 기업과 예술가가 협업하는 아트 마케팅 2.0이 진행돼 왔다는 얘기다.

역사는 짧지만 국내에서도 2.0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LG전자의 경우 냉장고와 에어컨의 외관을 유명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제품과 예술의 만남을 주도했다. 이동기 작가는 지난해 쌍용자동차와 함께 아트 카를 선보이더니, 올해는 삼성 갤럭시와 아모레퍼시픽 헤라 등과 패키지 디자인 작업을 했다. 전영근 작가는 기아자동차와 지하철 역사에서 콜래보레이션 작품을 전시했고, 임지빈 작가는 롯데 프로야구팀의 야구 용품을 친숙한 이미지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대중매체와 소비문화에 익숙한 1970년대생들이 가장 활발한 경제활동 층인 40대에 진입하면서 팝 아트가 본격적으로 일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낸시랭은 비키니를 입은 현대미술로 상징된다. 그만큼 파격적이고 물질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한국의 팝 아트는 외국과 달리 가볍고 해학적인 측면이 강하다. 강영민 작가는 "처음엔 낸시랭이 대중에게 소비된다는 게 놀라웠어요. 같은 팝 아티스트지만 문화적 쇼크였죠. 아트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바뀌고 있다는 방증이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요즘엔 아티스트가 만드는 속옷까지 TV홈쇼핑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아트는 기업의 제품에 희소가치까지 부여한다. 기업들은 이젠 단순 정보 전달만으로 소비자를 사로잡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기업과 아티스트가 협업하는 아트 마케팅 2.0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이유다.

아트 마케팅 1.0

기업들이 처음부터 아티스트와의 협업에 눈을 뜬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제품에다 예술 작품을 그대로 프린트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기업이 흔히 말하는 디자인 경영의 한 방식이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2년, 당시 세계 최대 크기였던 63인치 PDP TV 신제품 발표회를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개최했다. 유서 깊은 박물관에 설치한 PDP TV로 세계 유수의 명화를 고화질로 선명하게 재현해냈다. 예술을 존중하는 기업이라는 고급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예술 작품을 그대로 소비하는 아트 마케팅 1.0세대의 전형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대기업은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애플의 급성장을 보면서 긴장했다. 애플처럼 디자인으로 시작해서 디자인으로 끝나는 글로벌 기업들을 뛰어넘으려면 디자인 경영이 임직원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어야 가능하다. 애플이 IBM과 노키아를 앞지른 것은 그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디자인 천재들이 애플에 일찍부터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플에는 수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앱스토어가 있다. 애플이 대중에게 선사한 꿈의 작업장이다. 디자인과 콘텐츠를 애플 혼자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이장우브랜드마케팅그룹의 이장우 회장은 비즈니스와 아트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애플을 이기기 위해서는 애플과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애플을 따라가려고만 하죠.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애플을 이기지 못할 겁니다. 애플을 넘어서려면 비자트('비즈니스와 아트의 결합'이라는 뜻의 신조어)를 하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기업들이 디자인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후발 업체가 지금 디자인 경영을 시작해서 쫓아가려면 너무 늦습니다." 한국식 디자인 경영도 한물갔다는 얘기다. 아티스트와 콜래보레이션을 하는 아트 마케팅 2.0 전략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트 마케팅 3.0

아트 마케팅의 마지막 단계는 작가 자체를 마케팅하는 상황이다. 아트 마케팅 3.0시대에는 제품에 대한 설명을모조리 빼고 작가와 작품만을 홍보한다. 루이비통과 무라카미 백의 경우도 아트 마케팅 3.0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강영민 작가는 "루이비통이 무라카미 백을 완성했을 때 가장 최우선으로 펼친 전략은 아티스트인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을 홍보한 겁니다. 그의 작품이 유명세를 타자, 자연스럽게 무라카미 백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한 거죠"라고 말했다.

미국의 패션 업체 바나나리퍼블릭은 아트 마케팅 3.0을 좀더 세련되게 매만졌다. 서정적인 초상화로 유명한 미국의 여성화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전시회를 특별한 방식으로 후원했다. 영국 런던에서 2009년 회고전을 열면서 바나나리퍼블릭은 제품 마케팅을 일체 배제했다. 런던 중심지에 있던 바나나리퍼블릭 대형 매장에서는 쇼윈도 전체에 현수막을 내걸고 페이튼 전시회를 홍보했다.

아트 마케팅 3.0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현대카드는 지난 5월 세계적인 팝 가수 레이디 가가의 슈퍼 콘서트를 잠실에서 열었다. 현대카드가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초청한 16번째 슈퍼 콘서트였다. 현대카드는 슈퍼콘서트를 비롯해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의 빅 매치를 열기도 한다. 정유진 현대카드 과장은 "카드 회사가 할 수 있는 이벤트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걸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이벤트로 특별히 현대카드를 홍보하려는 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팝 아트의 대가로 불리는 앤디 워홀은 작품활동을 한창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비즈니스 아트(Business Art)를 하고 있다." 강영민 작가는 말한다. "오늘날 팝 아티스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찬양하는 부류에 가깝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는 프라이스(Price) 쪽으로 성장했습니다. 기업은 극단적 이윤추구로 몸집을 부풀렸죠. 값이 되는 것만 생각한 거예요. 그러다 이제 프라이스리스(Priceless)의 기류가 불기 시작한 겁니다. 대중의 소비문화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 쪽으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팝 아트는 그 흐름을 미리 간판하고 프라이스리스를 추구하는 대중문화 시장에 먼저 가 자리를 잡고 있다. 강영민 작가는"팝 아티스트만큼 시대의 변화와 대중의 심리에 관심을 두는 창작자는 없다"고 말한다. 오는 6월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것이 대중미술이다'라는 전시회에는 아트와 기업의 만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이 대거 출품된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업이 팝 아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제 아트가 기업에게 밥을 먹여주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아트 마케팅 3.0 전략은 한국 기업이 디자인 경영으로 중무장한 글로벌 기업을 추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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