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과 제일기획.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이 회사들은 패션ㆍ광고라는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국내 최고를 달리고 있다. 두 회사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양사에서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는 이서현 제일모직ㆍ제일기획 부사장이다. 튼실한 두 마리 토끼를 양손에 틀어쥔 이 부사장의 향후 행보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패션, 디자인 분야에 강점

이서현 부사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녀이자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동생이다. 1973년생인 이서현 부사장은 서울예술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3대 패션학교로 불리는 파슨스디자인스쿨을 1997년 졸업했다. 미술을 전공한 모친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을 닮아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이 부사장은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본격적으로 패션과 디자인 분야에 애착을 갖게 됐다.

2000년 이재용 사장의 중학교 동창인 김재열 삼성엔지니어링 사장과 결혼하고 이듬해 딸을 출산한 이 부사장은 2002년 마침내 경영전선에 발을 디딘다. 전공을 살려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한 이 부사장은 2005년 상무, 2009년 전무를 거치며 줄곧 회사의 미래전략과 상품기획을 담당했다. 2009년 말부터 제일기획의 전무도 역임하게 된 이 부사장은 기획 관련 업무를 직접 챙겼다. 2010년 제일모직과 제일기획 양쪽에서 부사장에 오른 이 부사장은 마침내 패션ㆍ광고를 아우르는 '이서현 시대'를 맞이한다.

제일모직 급성장

이서현 부사장의 합류 이후 제일모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왔다. 이 부사장이 입사했던 2002년 채 2조원에도 못 미쳤던(1조7,522억원) 제일모직의 매출은 2010년 5조원을 돌파(5조1,130억원), 지난해 5조5810억원으로 대폭 상승했다. 영업이익도 2002년 1,821억원에서 지난해 2,871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이 부사장의 임기 중 가장 눈에 띄게 성장한 브랜드 중 하나는 '빈폴'이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캐주얼 브랜드의 선두주자였지만 성장한계를 보이고 있었던 빈폴의 매출은 이 부사장이 취임한 2002년 2,000억원에서 2005년 3,000억원, 2008년 4,000억원 등 3년마다 1,000억원씩 증가했다. 2010년 5,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빈폴은 지난해 6,000억원 고지마저 정복했다.

제일모직 여성복 포트폴리오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는 '구호'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인수 당시 100억원에 불과했던 구호의 매출은 연평균 50%의 성장을 거듭, 지난해 900억원을 돌파했다.

지난 2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과 명동에는 이 부사장이 지난 3년간 공들여 탄생한 SPA(제조ㆍ유통ㆍ판매 일괄) 브랜드인 '에잇세컨즈'가 문을 열었다. 디자이너만 최소 30~40명이 동원됐다는 에잇세컨즈는 '유니클로보다 품질은 좋게, 자라보다 감도는 높게'라는 이 부사장의 특명을 받고 만들어졌다.

이 부사장은 10개 매장 오픈, 매출 600억원 달성을 에잇세컨즈의 올해 목표로 하고 있다. 에잇세컨즈를 제일모직의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2015년 중국 등 글로벌 시장에 진출, 2020년 300개 매장에 1조5,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겠다는 계획이다.

제일기획, 국내 1위 고수

지난달 23일 폐막한 '2012 칸 국제광고제'에서 제일기획은 금상 3개, 은상 4개, 동상 5개 등 총 12개의 본상을 차지했다. 총 26편이 본선에 진출 12개의 본상을 받은 것은 국내 최초의 기록이다. 칸 국제광고제의 전체 출품작이 3만5,000여편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만한 성과다.

이 같은 제일기획의 성과에 대해 광고업계에서는 이서현 부사장의 역할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 부사장의 적극적인 지원이 제일기획으로 하여금 글로벌 주요 업체로 떠오르게 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제일기획 내에서는 이 부사장 취임 이후 아이디어 중심의 조직문화와 디지털 마케팅 역량이 강화됐고 직원들에 대한 투자와 혜택도 늘었다는 평이 많다.

이 부사장이 제일기획의 경영을 챙기기 시작한 것은 2009년 말부터다.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 부사장이 기획 담당으로 영입된 이후 제일기획은 2위로 바짝 쫓아오던 이노션과의 광고취급액 격차를 처음으로 벌리며(2,213억원→6,641억원) 국내 1위 광고대행사로서의 입지를 분명히 했다.

소탈하지만 추진력 강해

이서현 부사장을 만난 사람들은 소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이 자주 목격되기도 하고 임직원들의 경조사를 직접 챙기는 등 재계 1위 그룹인 삼성의 차녀임에도 이 부사장의 행동에는 소탈한 성격이 묻어난다는 평이다. 이 부사장은 타이트한 일정에도 자녀들의 교육은 직접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실청소, 환경미화 등 학부모들이 참여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선다고 전해진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에 대한 이 부사장의 추진력은 상당한 편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이건희 회장 등 삼성가 특유의 성격처럼 신중히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편이지만 자신이 결정한 바는 끝까지 관철시키는 성격이다.

삼성가 3세의 한 축

이서현 부사장은 이재용, 이부진 사장과 함께 삼성그룹 3세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세 남매는 맡고 있는 분야가 확연히 다르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장남인 이재용 사장이 그룹의 핵심인 전자ㆍ금융계열을 물려받고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이 각각 유통ㆍ서비스계열, 패션ㆍ화학ㆍ광고계열을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그룹을 계열분리해 이건희 회장 형제들에게 나눠줬던 것도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한다.

물론 계열분리 이전에 선행돼야 하는 지주회사로의 전환에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는 터라 이 같은 과정이 당장 이뤄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열분리 후 패션ㆍ화학ㆍ광고계열을 맡게 될 이 부사장이 향후 국내 패션ㆍ광고업계의 대모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출생 1973년 9월 20일

학력 서울예고(1992)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1997)

2002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

2004 제일모직 패션부문 기획팀 부장

2005 제일모직 패션부문 기획담당 상무

2009 제일모직 패션부문 기획담당 전무

2009 제일기획 기획담당 전무

2010 제일모직, 제일기획 부사장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