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이어져오던 전통이 불가피한 상황을 맞아 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갈 구심점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형제경영'이라는 전통이 깨지게 된 금호가 또한 마찬가지다. 계열분리를 앞둔 금호석유화학(이하 금호석화)에서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상무보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두 번의 상무보 승진

1978년에 태어난 박준경 상무보는 서울 구정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환경생태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계 기업에서 경험을 쌓던 박 상무보는 2007년 금호타이어 차장으로 입사, 이듬해 말 회계팀 부장으로 승진했다. 오너일가 자제들이 선호하는 기획이나 마케팅부서가 아닌 회계팀에서 경력을 쌓으며 회사의 전반적인 동향을 이해하는데 주력한 셈이다.

2010년 2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채권단과 합의한 분리경영 방침에 따라 금호석화로 자리를 옮겨 해외영업 팀장(부장)을 맡았고, 그 해 4월 승진인사를 통해 상무보를 달았다. 그러나 임원에 오른 지 불과 3개월 만인 2010년 7월 부장으로 강등됐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할 수 있는 총수의 아들임에도 이례적으로 다시 부장급으로 내려간 배경에는 "일선에서 좀 더 실무경험을 쌓으라"는 부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조언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박 상무보는 지난해 말 다시 상무보로 승진했다. 1년 5개월여만에 다시 임원 대열에 진입한 것이다. 금호석화 관계자는 "계열분리를 앞두고 실적이 좋았던 박 부장을 상무보로 승진시켜 전진배치한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박 상무보의 승진이 박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였던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의 장남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가 부사장에 오른 지 불과 닷새 만에 발표된 소식이라 '아버지들 간의 싸움이 자녀들의 승진을 부추겼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현재 박 상무보는 영업담당 상무로, 금호석화 주력사업인 합성수지의 해외판매를 맡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합성수지 사업이 위축된 상태지만 차별화된 전략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이다.

먼저 머리숙여 인사

박 상무보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성품에 대해 소탈하고 예의 바르다고 입을 모은다. 직원들을 대할 때 여타 오너일가 자제들처럼 목에 힘을 주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회사 복도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평소 예의를 강조하는 박찬구 회장으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결과다.

박 상무보의 성실한 성품은 학창시절에도 유명했다. 한때 박 상무보를 가르쳤던 이대영 서울시 부교육감에 따르면 박 상무보는 구정고에 다닐 때에도 성실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재벌집 아들티를 전혀 내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렸으며 예의도 발랐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금호석화에 불러들이기 전까지, 사실상 적진이나 다름없는 금호타이어의 회계팀 부장으로 근무했던 박 상무보는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전해진다. 식사 자리에서나 회의 석상에서 알게 모르게 소외되는 것을 감내하고 꿋꿋이 버티며 업무를 감당해냈다는 것이다. 이후 금호석화로 자리를 옮긴 박 상무보는 어려웠던 시절, 자신에게 힘이 돼준 직원들을 중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계열분리 눈앞에

현재 금호가는 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 금호산업 등으로 구성된 '형' 박삼구 회장 측과 금호석유화학, 금호피앤비화학, 금호개발상사 등으로 구성된 '동생' 박찬구 회장 측으로 나뉜 상태다. 지난해 말 박삼구 회장과 박세창 부사장이 금호석화 지분을 전무 매각한 터라 금호석화가 보유한 아시아나항공의 지분 12.61%만 3% 미만으로 낮아지면 금호그룹은 완전히 계열분리될 예정이다.

본래 금호가는 국내 재벌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형제경영의 전통을 이어왔다. 장남인 고 박성용 회장을 거쳐 차남인 고 박정구 회장과 삼남 박삼구 회장까지 그룹의 총수직이 이어져 왔고 형제들이 가구별로 10.1%씩의 동일한 지분을 확보, 가족회의를 통해 주요 사안을 결정했다. 그러나 2009년 일어난 '형제의 난'에 이어 박삼구, 박찬구 형제가 동반 퇴진하면서 금호가의 전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금호가 '형제의 난'은 2006년 박삼구 회장이 무리하게 인수했던 대우건설을 결국 그룹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되팔면서 시작됐다. 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박찬구 회장이 박준경 상무보와 함께 회사 지분을 사들이면서 보유지분을 18.47%로 높였고, 박삼구 회장은 이에 대응하여 주식 매입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이사회를 열고 두 회장 모두 사임했다.

2010년 경영에 복귀한 박삼구, 찬구 회장은 금호석화의 계열분리라는 최종안에 합의, 각자 보유하고 있던 상대방 계열사의 지분을 매각하고 마침내 계열분리를 눈앞에 두게 됐다. 오는 9월에는 아예 본사를 서울시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사옥에서 중구 수표동 시그니처타워로 이전해 물리적으로도 완전한 분가를 이룰 전망이다.

오너리스크 이겨낼까

염원했던 계열분리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금호석화는 '오너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박찬구 회장이 횡령ㆍ배임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까닭이다.

박 회장은 2009년 6월 내부 정보를 이용,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매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포착, 보유 중이던 금호산업 지분 262만주(보유지분의 88%)를 팔아 102억원의 손실을 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1999~2009년 비상장 계열사인 금호피앤비화학의 법인자금 107억5,000만원을 무담보 또는 저리로 빌려 쓰는 수법으로 총 274억원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도 받고 있다. 박 회장은 이같은 혐의로 지난 9일 2차 공판을 받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박 회장이 어떤 선고를 받을 지 예의주시 중이다. 그러나 설사 박 회장이 무죄 선고를 받더라도 오너리스크를 완전히 벗어버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박 회장의 '오너 리스크'로 재계의 시선은 자연스레 박 상무보의 향후 행보로 쏠리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재판 결과가 안 좋을 경우,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계열분리 후 박 상무보에게 경영권을 일임할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이다. 이에 금호석화 측은 "박준경 상무보는 아직 경영수업 중이라 경영권 승계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했다.

승계 위해 실적 이끌어야

박준경 상무보가 경영권을 이양받기 위해서는 계열분리 후 확실한 실적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 회사의 상황은 아주 좋은 편이다. 금호석화는 2009년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한 지 3년 만에 약정을 졸업했다. 지난해에는 각각 6조4,574억원, 8,422억원이라는 경이적인 매출, 영업이익을 기록하기도 했고 최근 한국신용평가원으로부터 역대 최고 신용등급인 A-를 받았다.

회사의 사정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금호석화는 주력인 합성고무를 중심으로 신소재, 태양광발전사업 등에 잇달아 진출하며 사업 다각화에 적극 나선 상태다. 현재 합성수지의 해외 판매를 담당하며 좋은 평을 듣고 있는 박 상무보가 보폭을 넓힐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유가 상승 및 글로벌 경기침체로 합성수지 부문의 업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자신의 영역인 합성수지 부문을 넘어 주요 신사업에서 좋은 성적을 올림으로써 박 상무보의 경영자질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차기 후계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