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하늘을 신성하게 여겼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소도(蘇塗)에는 국법조차 미치지 못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살펴보면 "마한에는 소도가 있는데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안으로 도망간 자를 잡아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오늘날엔 명당 성당이 소도 노릇을 해왔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명당성당에서 종교인과 정치인, 학생이 반독재 시위를 벌여도 경찰은 감히 민주화 성지 명동성당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주교 사제들은 1974년 9월 26일 한국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고(故) 지학순 주교가 유신 헌법 무효를 선언하다 구속되자 정의구현사제단은 월요일 저녁마다 명동성당에서 인권회복미사를 봉헌했다. 원주에서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복음화 운동, 교회 밖에서는 민주화와 인간화 운동에 앞장섰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던 시절 사제들은 정의를 구현하겠다며 헌신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75년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벌였고, 1976년엔 명동성당에서 고(故) 김대중ㆍ함석헌 등과 함께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1987년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군부 독재는 설 곳이 없게 됐다. 정의구현사제단과 명동성당은 쫓기는 자의 피난처로서 거짓을 고발하는 사람과 고난을 받는 민중의 벗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상징하는 함세웅(70) 신부는 옥살이를 하면서 감옥을 제2의 신학교라고 생각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함 신부는 정치적인 활동을 금지하는 교황청에 예수님 정신으로 정의를 외치는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지기도 했다. 함 신부는 지난달 26일 사제생활 44년을 정리하는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과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나에게 오너라'란 복음을 통해 고통 받은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