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한국을 대표하는 재계 거목이자 거부(巨富)들이다. 재산은 그야말로 천문학에나 등장할 수준. 특히 이건희 회장은 지난 3월 보유주식의 가치가 한국 증시 사상 최초로 10조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들 '회장님'의 공통점은 재벌가 출신이라는 점. 시쳇말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물려받은 회사를 세계적인 거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실제로 밑천 없이 성공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세간에선 '보통사람이 부자가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자조 섞인 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정설'이 깨지고 있다. 맨땅에서 수천억원 가치의 회사를 일궈낸 자수성가형 신흥 거부들이 국내 재벌 리스트에 속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들의 '성공신화'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보통사람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흥거부들은 기존의 재벌 회장들에 비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김택진
<주간한국>이 창간 48주년을 맞아 향후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갈 신흥 거부들을 전격 조명해 봤다.

최근 한국의 부자 지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자수성가형 신흥 거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올 초 '재벌닷컴'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만 45세 미만의 상장사 주식부자 상위 100명 가운데 자수성가형 부자가 19명이나 포함됐다.

신흥 부자들은 ▦ NXC 회장(2조94억원) ▦ 엔씨소프트 사장(1조6,624억원) ▦ NHN이사회 의장(4,716억원) ▦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의장(3,428억원) ▦ 전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2,506억원) ▦ 골프존 회장(1,690억원) ▦ 네오위즈 사장(1,412억원) 등이었다.

'은둔의 재력가'

한국 '부의 지도'를 새로 쓴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NXC(옛 넥슨) 회장이다. 김 회장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벤처기업을 차려 자신의 힘으로 신흥 부호 대열에 합류했다.

박관호
김 회장은 1994년 세계 최초 MMORPG 게임인 '바람의 나라'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바람의 나라'는 큰 성공을 거두며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았다. 이후 김 회장은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등 히트게임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온라인게임 시장의 대부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들어 김 회장은 인수합병(M&A)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지난 2004년 '메이플스토리'의 개발사였던 위젯 인수를 시작으로 2005년 넥슨모바일, 2006년 두빅엔터테인먼트, 2008년 네오플, 2010년 게임하이와 엔도어즈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김 회장이 추진한 M&A 작업의 대부분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네오플 인수가 특히 그랬다. 넥슨은 당시 네오플을 3,80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가가 너무 높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으나 네오플은 인수 이듬해인 2009년에만 매출 1,558억원, 영업이익 1,314억원을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김 회장은 그러나 회사를 진두지휘 하면서도 철저히 뒤에 숨어 있었다. 막후에서 회사의 큰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래서 학력이나 주식 등 일반적인 프로필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김 회장이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는 이유다.

김 회장이 현역에 있을 당시에도 회사의 대외적인 활동은 넥슨 공동창업자인 송재경 XL게임즈 대표가 전담하다시피 해왔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은둔은 계속됐다. 언론은 물론 회사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해진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영은 전문경영인(CEO)에게 맡기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 등을 배우거나,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특강을 맡아 강의를 하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임업계의 신화'

엔씨소프트 대표는 게임업계서 김 회장의 라이벌로 유명하다. 김 회장(컴퓨터공학과 86학번)과 서울대 1년 선후배 사이인 김 대표(전자공학과 85학번)는 게임업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통한다.

김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프로그래밍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1989년 문서편집용 소프트웨어인 '아래아한글'을 개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한글타자 연습 소프트웨어 '한메타자교' 도 김 대표의 작품이다.

대학 졸업 후 병역특례연구원으로 입사한 현대전자에서 국내 최초의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인 '아미넷'을 만드는 등 경험을 쌓았다. 이후 서울대 박사학위를 밟고 있던 1997년 자본금 1억원을 들고 엔씨소프트를 설립하며 온라인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재웅
김 대표는 창업 이듬해인 1998년 한국 온라인게임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리니지'를 선보였다. 리니지는 유료서비스를 시작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회원수 100만명을 돌파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리니지 열풍은 엔씨소프트의 실적으로 이어졌다. 1997년 창업 첫해 5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3년 뒤인 2000년 무려 570억원으로 급증했다.

김 대표는 2003년 '리니지2'와 2008년 '아이온'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사실상 온라인 게임계의 황제로 등극했다. 이 게임들은 아직까지도 게이머들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김 대표의 경영스타일은 '꾸준함'으로 요약된다. 수천억대 회사의 대표직을 맡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역 프로그래머로 게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이를 대변한다.

"아이디어는 계속 일에 매진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고 있을 때 나온다"는 게 김 대표의 지론이다. 김 대표는 새 게임의 출시를 앞두고 있을 때는 직원들과 함께 회사에서 게임을 점검한다. 밤을 새는 일도 허다할 정도로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나성균
'중국 게임시장 평정'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 의장도 게임사업으로 신흥 부자 반열에 든 경우다. 박 의장은 1996년 군대시절 기획 아이디어를 꼼꼼히 적어 놓았던 낡은 노트 한 권을 쥐고 온라인게임 개발에 투신했다.

박 의장은 '액토즈소프트'라는 회사를 설립해 온라인게임인 '미르의 전설'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2000년 일부 개발자들과 친정인 액토즈소프트에서 독립해 '미르의 전설2' 개발에 착수했다. 작업 진척도는 빨랐다. '미르의 전설'를 개발하면서 쌓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르의 전설2'는 이듬해인 2001년 초 국내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박 의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중국시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주변에선 강하게 만류했다. 수익성도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박 의장은 모든 우려를 뒤로 한 채 해외진출에 덤벼들었다. '기회는 당장 차려진 것에 있지 않다'라는 신념이 있어서였다.

김영찬
결과는 '대박'. '미르의 전설2'는 2002년 70만명이라는 전무후무한 동시접속자 기록을 세우며 중국 온라인 게임 시장을 평정했다. 당시 매출의 80%가 중국 나올 정도였다.

물론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다. 위메이드의 모태였던 '액토즈소프트'가 중국 유통사인 샨디에 인수 당하는 등 불협화음도 있었다. 그러나 박 의장은 아랑곳 않고 새로운 게임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위메이드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놨다.

박 의장은 "최대 목표는 위메이드를 '게임을 잘 만드는 회사'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를 위해 박 의장은 직원들의 복지에 힘쓰고 있다.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직업 능률을 높이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박 의장은 사옥에 헬스장과 샤워실, 카페 등을 설치하는 등 식구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매진한다고 한다.

'네이버의 아버지'

NHN 의장은 한국 최고의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를 통해 큰 부를 쌓았다. 1992년 삼성SDS에 입사한 이 의장은 검색 기술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구를 계속하다 1997년 사내 벤처 1호 '네이버포트'를 설립했다.

2년 뒤인 1999년 삼성SDS에서 분사해 5억원의 자본금으로 네이버컴을 설립했고, 곧바로 한국기술투자로부터 1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최고의 검색 기술로 한국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뚜렷한 수익 모델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인터넷 산업 최고의 수익 모델인 검색 광고가 아직 등장하기 전이다. 야후, 다음 등 막강한 선두 주자에 가려진 신생 4위 업체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그 돌파구로 이 의장은 한게임 인수를 결정했다. 인수와 동시에 사명도 NHN(Next Human Network)으로 바꿨다. 게임과 인터넷의 결합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밀어붙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네이버의 검색과 한게임의 게임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NHN을 국내 1위 인터넷 기업에 올려놓았다.

합병이 이뤄진 2000년 당시 네이버컴의 매출은 88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NHN 매출은 2조1,474억원이었다. 불과 11년 사이 매출이 200배 넘게 성장한 것이다. '국내 사상 가장 성공적 인수합병 사례라는 찬사'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이 의장은 NHN 내부에서 '아이디어 뱅크'로 통한다. 지식인, 통합검색, 오픈캐스트 등 지난 10년 동안 인터넷포털 네이버의 분수령을 이룬 서비스 중에서 그의 아이디어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의장은 늘 아이디어가 생기면 해당팀에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적극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회사 안팎에서 이 의장이 경영자보다는 기획자에 더 가깝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현재 이 의장은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 의장은 경영이 아닌 서비스 기획으로 네이버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역발상 일인자'

-이 게임업계의 라이벌이라면 포털업계 1인자인 이 의장의 라이벌은 전 다음커뮤니케이션스 사장이다. 이 전 사장의 다음은 네이버와 함께 업계를 양분하고 있다.

이 전 사장이 창업을 결심한 것은 프랑스 유학 시절인 1994년이다. 언어학자 놈 촘스키의 일대기를 영화로 본 게 계기가 됐다. 이는 동티모르에서 거대 미디어가 사회적 합의를 조작해 나가는 모습을 고발한 영화다.

이 전 사장은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개념의 미디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 박사 학위 과정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이 전 사장은 1997년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을 내놓으면서 신화의 서막을 알렸다. 한메일은 서비스 오픈 3년 3개월 만에 1억 페이지뷰를 돌파했다. 이는 국내 단일 사이트로는 최초다.

2년 뒤인 1999년에 출시한 '다음카페'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다음카페는 인터넷이 사람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커뮤니티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네티즌에게 알린 최초의 모델이다.

한메일과 다음카페의 성공에 힘입어 다음은 1999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2000년 온라인 쇼핑몰 '다음쇼핑(현 디앤샵)'을 오픈하면서 사업 영역을 쇼핑분야까지 넓힌 데 이어 재테크 정보까지 제공하는 '다음 금융플라자'도 선보였다.

이 전 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3년 네티즌들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미디어 다음'과 온라인 자동차보험인 '다음다이렉트자동차보험'을 설립했다. 이후 2004년 미국의 인터넷 포털 라이코스를 인수하면서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렸다.

이 전 사장은 현재 현직에서 물러나 최대주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전 사장이 평소 강조하던 수평적이고 체계적인 경영 시스템이나 역발상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등의 경영 방식은 다음커뮤니케이션 고유의 스타일로 남아 있다.

'IT 평정한 경영학 수재'

네오위즈 사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IT업계 강자다. 나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와 KAIST 경영과학대학원을 졸업한 수재다. 경영학도인 나 사장이 벤처의 길로 나간 것은 KAIST 대학원 시절 넥슨에서 일을 하다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 어쩌면 자신의 잠재력을 적시에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

나 사장은 넥슨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 네오위즈를 창립했다. 그 해 푸시솔루션(자동표출)을 개발해 대기업에 납품했고, 이 때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원클릭 시스템을 개발했다. 원클릭은 '한번 클릭으로 인터넷에 바로 접속한다'는 개념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98년 제품발표회를 한 후 전화 문의가 빗발쳤다. 이틀간 업무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인터넷이 본격 보급되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원클릭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후 20여개의 경쟁사가 등장했다. 그러나 매출은 매달 두 배씩 늘었다. 경쟁사의 등장에 따라 시장이 대폭 확장된 데다 후발주자들의 성능이 원클릭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 확대에 따라 경쟁업체는 수백여개로 늘어났지만 원클릭은 여전히 독보적이었다. 시장점유율이 60%에 이를 정도였다. 1998년 5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경쟁사들이 쏟아진 1998년 말부터 수직 상승, 1999년에는 무려 17배 늘어난 85억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기에 1999년 오픈한 채팅사이트 '세이클럽'도 네오위즈의 성장을 이끌었다. 세이클럽은 불과 6개월만에 당시 채팅시장의 영원한 1인자일 것 같았던 하늘사랑의 '스카이러브'를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나 사장은 2003년 공익근무요원으로 실무에서 떠났지만, 복무 중에도 개발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온라인 음악 서비스 쥬크온 아이디어는 그때 나왔다. 쥬크온은 유료 가입자수 1위를 기록하며 인터넷 유료 음악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군복무를 마친 나 사장은 2005년 대표자리로 복귀해 게임 사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스폐셜포스'와 '요구르팅' 등이다. 나 사장은 국내 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등 해외 시장에도 눈을 돌려 사세를 불렸고, 지금의 네오위즈를 만들었다.

스크린 골프 아버지 ''

골프존 회장은 다른 신흥 거부들과 차이가 있다. 유일하게 IT가 아닌 분야에서 성공을 이뤘다는 점이다. 여타 신흥 거부들이 모두 40대인 반면, 유일하게 60대라는 점도 다르다.

1973년 홍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GM코리아에 입사해 브레이크시스템 업무를 맡았다. 1979년에는 삼성전자로 옮겨 통신 시스템 분야에서 일했다. 1993년 시스템 사업부장으로 통신 서비스 업무를 다루다가 직접 사업을 해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고심 끝에 만 20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을 접고 '영밴'이라는 부가통신 서비스업체를 차렸다. 그가 도전한 첫 번째 아이템은 '700 전화정보 서비스'로 불리던 음성사서함(VMS) 사업이었다. 대전에 본사를 두고 서울과 부산에 지사를 낼 정도로 괜찮았다.

하지만 김 회장은 7년 만에 영밴을 폐업했다. 700 전화사업이 음란ㆍ퇴폐로 흐르는 것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 경쟁자가 너무 많아진 것도 부담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골?관련 사업이었다. 당시는 김 회장이 10년차 골퍼로 한참 재미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창업한 골프존은 2002년 첫 제품을 출시했다.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은퇴 후 소일거리로 시작한 사업은 골프 붐과 함께 뜨겁게 타올랐다. 김 회장 스스로도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난 지금, 자본금 5억원으로 시작한 골프존은 매출 1,840억원, 영업이익 620억원의 알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골프존은 단숨에 시가총액 1조원을 넘겼다.

김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건 당장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김 회장 스스로도 늘 그렇게 살아왔다. 직원들에게 보내는 최고경영자(CEO) 메시지를 통해서도 '젊은이여, 야망을 버려라'고 조언할 정도다.

김 대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먼저 골프 산업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 분야 개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일본 도쿄·오사카, 중국 상하이, 캐나다 토론토 해외 진출에도 양팔을 걷어 부쳤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