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계 발목 잡은 은밀한 대화 '메모'

공정위, 신세계SVN 부당지원 정용진 부회장 쪽지로 단서 제시

국민주택채권 매입가 담합 메신저로 나눈 정보공유 들통나
19개 증권사 200억원 과징금 철퇴

방사청 벙커버스터 구매 폭리 의혹 무기중개상 친필 메모 드러나
고위 간부-커넥션 배후 근거 지목

나주초교생 성폭행 사건 당시 PC방 이용객 쪽지 제보로 성명 확인 후 범인 검거

검찰 "내부고발자·피해자들이 제보용도로 쪽지 이용 비일비재"

인터넷, 스마트폰 등 첨단 통신시대에 살고 있지만 보안문제는 항상 신경 쓰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등장한 것이 메모 또는 쪽지다. 정치권, 재계, 수사기관 등에서는 수시로 쪽지를 은밀히 주고받는다. 쪽지를 건넨다는 의미는 주고받는 당사자 외에 남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즉, 극도의 보안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친전(親展)'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쪽지가 도리어 화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민감한 내용을 남몰래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 쪽지마저 유출돼 낭패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다.

얼마 전 모 정치인이 쪽지로 곤욕을 치른 적 있다. 쪽지를 읽는 장면과 그 쪽지의 내용이 사진기자의 렌즈에 포착된 것이다. 종이쪽지뿐 아니라 온라인상의 쪽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정치권 재계 등에서 오가는 각종 쪽지는 사정기관의 수사 단초로 활용되거나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세계그룹의 베이커리 사업에 대한 불공정거래의 단서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지시사항이 적혀진 메모가 노출된 것이다.

이 쪽지에는 "수수료 D&D(데이앤데이) 20.5%, 피자 5% 확정(정 부회장님)", "사장단 회의 시 허 실장님 지시사항 베이커리 지원할 것", "회장님, 대표이사님 그룹 지원 당부" 등 민감한 내용이 적힌 정 부회장의 쪽지다.

잘못 활용 땐 치명타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3일 신세계그룹의 신세계 SVN에 대한 부당지원증거로 이 같은 내용의 메모를 2009~2011년 담당자 노트기록, 회의록·이메일 등에서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내용이 드러나면서 신세계는 한바탕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지난 18일에는 국민주택채권 매입가를 담합한 19개 증권사에 200억원대의 과징금이 부과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졌다. 20개 증권사 중 19개 증권사가 국민주택채권을 팔 때 동일한 가격을 써 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5월 감사원 조사 결과 2009년에는 19개 증권사가 75%, 2010년에는 88% 이상 동일한 가격을 제출한 것이 확인됐다. 동일 가격 제출이 가능했던 것은 증권사 내 국민주택채권 매입 등의 담당자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보고서에서 "(채권매입담당자들은) 평소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던 중 2009년 초 증권사별 신고가격을 일치시키자고 공모했고 이후 매일 인터넷 메신저나 쪽지 등을 통해 정보를 공유했다"면서 "신고시장수익률(매입가격)이 채권 장외시장 종가수익률을 기준으로 약 0.2%p 이상 차이(스프레드)를 유지하도록 조정해왔다"고 밝혔다.

또 2006년 벙커버스터 구매 과정에서 300억원 가량 바가지를 쓴 의혹이 최근 제기되고 있는데 이 역시 무역중개상 A씨가 2006년 4월 18일 친분이 두터운 방위사업청 고위 관계자와 만나고 난 뒤 쓴 쪽지가 수사의 결정적 근거로 활용됐다.

쪽지에는 "일차(1차)와 동일 방법으로 결정 예정. 6월 사업방법 결정. 염려할 일 없다"고 적혀 있다. 검찰이 필적을 감정한 결과 A씨의 친필로 나와 A는 난처한 입장이 됐다.

지난 14일 검찰과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 박순철)는 지난해 4월 권익위로부터 수사의뢰를 받아 방사청 관계자 등을 소환조사했으며 최근 무기중개상 A씨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기관 수사 돕는 메모

방사청은 2007년 국내 방산업체인 한화와 미국의 무기업체 D사를 사업자로 선정한 뒤 600억원을 들여 한 발에 3977만원씩 벙커버스터 1000여 발을 구매했지만 방사청은 2004년에는 미국 정부와의 직거래를 통해 벙커버스터 116발을 한 발에 약 1,300만원씩 구매했다.

3년 만에 3배 가까이 납품가가 오른 것이다. 이는 2004년에는 미국 정부를 통해 완성탄을 사오는 대외군사판매제도(FMS) 방식으로 구매했지만, 2007년 갑자기 미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하는 '국내구매 방식'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검찰에 따르면 두 사람이 2006년 4월 18일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만나 국내구매 방식에 대해 합의했기 때문 방사청 고위 간부와 무기중개상 A씨의 커넥션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근거가 A씨의 친필 메모다. 메모에는 그 만남 당일 '1차와 동일 방법으로 결정 예정. 6월 사업방법 결정 염려할 일 없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에는 박은정(40ㆍ사법연수원 29기) 인천지검 부천지청 검사가 김재호 (49ㆍ21기)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에게서 '기소 청탁'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는 내용의 쪽지를 후임인 최영운(45·27기) 대구지검 김천지청 부장검사에게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경찰은 당시 "최근 박은정 검사가 제출한 진술서에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진술서를 통해 박 검사는 "2006년 1월 당시 최 검사에게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 관련 사건을 인계할 때 김 판사(나 전 의원 남편)가 청탁한 사건이라는 내용도 함께 전달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메모나 쪽지는 제보용도로 활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내부고발자들이나 피해자들이 정식으로 고발이나 고소를 하지 않고 쪽지를 사정기관 관계자들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검찰은 여권의 모 인사에 대해 수사 중인데, 이 역시 익명의 정치권 인물로부터 건네 받은 쪽지에서 비롯됐다. 검찰은 쪽지 내용이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미루어 상당부분 사실일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경찰도 쪽지를 통한 수사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범인 검거의 결정적인 단서는 쪽지 1장이었다. 지난 8월 30일 오후 1시쯤 전남 나주시 영산대교 밑에서 성폭행당한 A양이 발견됐다. 탐문 수사에 나선 경찰은 동네 사정에 밝은 남성에게 "어두운 색 옷을 잘 입고 스포츠형 머리를 한 젊은 우범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남성은 "PC방에서 자주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을 알아봐 주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는 고종석이 즐겨 찾는 PC방 고객이었다. 그는 최모 경사에게 이름이 적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즉시 잠복에 들어간 경찰은 수일 후 단골 PC방을 찾은 고종석이 앉자마자 곧바로 검거했다.

한은정책 사전 노출 '메모 주의보'


기준금리인하 내부서 알린 듯

윤지환기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기준금리 변경에 대한 성명서인 '통화정책방향' 내용이 공식 발표에 앞서 쪽지 등을 통해 외부로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7월11일 금통위 회의를 하루 앞둔 오후 금리 인하 내용이 담긴 쪽지(인터넷 메신저)가 채권 매니저들 사이에 돌면서 이 같은 의혹이 불거졌다. 당초 선물회사 직원이 포지션(매도ㆍ매수 의도)을 정리하면서 악의적 루머를 퍼뜨리며 시세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튿날 기준금리가 인하되면서 의혹 발원지가 한은 내부로 번진 것이다.

이날 오후 3시께 채권 매니저들 사이에 "받은 글입니다. 한은 출입기자단에서 인하 얘기가 나왔다는 루머가 있었습니다"는 내용의 쪽지가 번졌다. 이날 결국 이날 국채 가격은 전일에 비해 11틱 오른 105.06에 장을 마감했고 국채 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3bp 내린 3.19%로 끝마쳤다.

이날 오전에는 실무진 동향보고가 있었다. 통상 금리가 결정되는 금통위 전날에는 한은 주요 부서의 실무진이 금통위원에게 경제상황을 보고하고 이에 대해 토론을 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런 정황들로 미루어 누군가가 메모 등을 외부에 유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치권도 메모에 홍역을 치르긴 마찬가지다. '정우택 괴소문'도 정당인 손인석(41)씨의 메모에서 시작됐다. 4ㆍ11총선을 앞둔 지난 3월 초순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당시 새누리당 중앙당 청년위원장이었던 손씨는 유력 정치인 K씨를 만나 '정우택이 제주도에서 성상납을 받았고, 일식집 주인과 불륜 관계에 있으며,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이를 지방의원들에게 배포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담긴 메모지를 전달했다.

K씨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손씨가 전달한 메모를 토대로 컴퓨터 파일로 정리한 뒤 USB메모리장치에 담았다. 그리고 같은 달 중순쯤 평소 알고 지내던 H씨(57ㆍ구속)에게 건네줬다.

H씨는 USB메모리장치에 담긴 내용을 홍콩에 있는 L씨(42ㆍ구속)에게 이메일을 통해 전달하면서 "정우택은 국회의원이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다. K씨가 정우택과 관련한 내용을 폭로하고 싶어한다. 'Crime to guilty 블로그'에 게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같은 내용들이 수사당국의 조사에서 드러나 정치권에는 메모 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윤지환기자 jj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