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걸어온 길중·고교 반에서 1등 모범생22세에 퍼스트레이디 대리청와대 나와 18년 절치부심… 정계 입문뒤 위기마다 승리 '선거의 여왕'

박근혜18대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선대위관계자들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뒤 걸어나오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박서강기자
대통령의 딸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5년 간격으로 흉탄에 잃었던 비극의 주인공이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온다. 그것도 청와대의 안주인이 아닌 주인 자격으로 말이다.

지난 19일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60) 당선자. 박 당선자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부녀 대통령,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과반 득표율 대통령이라는 진기록과 함께 청와대의 주인이 됐다.

박 당선자의 청와대 입성은 취임식이 열리는 내년 2월을 기준으로 하면 34년 만이다. 박 당선자는 10ㆍ26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지 한 달 만인 1979년 11월 두 동생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아버지라는 박 당선자는 청와대를 떠난 뒤 18년간 자연인으로 지내다 1998년 15대 총선(보궐선거)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 14년 8개월 만에 마침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된 것이다.

대통령의 딸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2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육군 소령인 박 전 대통령과 중등교사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2녀(근혜 근령) 1남(지만) 중 장녀였다.

직업군인의 딸이었던 박 당선자는 1961년 5ㆍ16 쿠데타와 함께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고 1963년 2월에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때부터 박 당선자는 영애(令愛)로 살아야 했다.

박 당선인자는 모범생이었다. 성심여중ㆍ고교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이공학부 수석으로 졸업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 "어머니는 사학과 진학을 바라셨지만,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공계를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던 박 당선자는 올해 환갑이지만 독신을 유지하고 있다. 박 당선자는 올해 초 SBS 오락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해 "대학 때 선망의 대상인 한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강대를 졸업한 박 당선자는 1974년 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교수가 돼서 대학강단에 서는 게 박 당선자의 꿈이었다.

학창시절 동생들과 함께 해변에서 /연합뉴스
하지만 같은 해 8ㆍ15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암살당하자 박 당선자는 급히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박 당선자는 저서에서 "영문도 모르고 공항에 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신문 기사를 본 순간 심장이 잘려 나가는 듯했다"고 술회했다.

22세에 불과했던 박 당선자의 '퍼스트레이디 대리인'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박 당선자는 외국 사절 영접과 소외계층 봉사활동 등 대외 업무를 수행하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웠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국정운영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1979년에는 아버지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도중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박 당선자가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10월27일 새벽.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은 어렵사리 비보를 전했다. 이때 박 당선자의 "전방은 괜찮습니까"라는 물음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5년 간격으로, 그것도 흉탄에 잃은 박 당선자는 동생들과 함께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훗날 박 당선자는 인터뷰에서 "그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서 흘릴 눈물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TV 드라마를 보다가 울면 '저 정도로 눈물이 나오나'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성심여중 시절 /연합뉴스
18년간 반강제 은둔생활

박 당선자는 사저로 나온 이후 18년간이나 반강제적인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박 당선자는 경제적으로야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버지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태도를 바꿔 박 전 대통령을 깎아 내리는 모습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동생인 근령씨와 지만씨의 방황도 박 당선자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박 당선자는 학문을 통해 정신적 충격을 털어냈다. 종교서적, 고전, 중국어, 영어 등을 익혔던 것도 이 기간이라고 한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초에는 한 신학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 재단 이사장 취임(1982년) 박정희 기념 사업회 발족(1988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취임(1994년) 등을 역임하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박 당선자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부터다. 박 당선자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 지원 활동을 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박 당선자는 이어 1998년 4월 대구 달성의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단란했던 시절, 온가족과 함께 / 연합뉴스
그런 박 당선자이지만 이회창 총재와 등을 돌리는 바람에 당을 떠난 적도 있었다. 박 당선자는 부총재 시절이던 2002년 2월 이 총재가 자신이 내놓은 당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탈당과 함께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박 당선자는 그러나 이 총재가 개혁안을 대폭 수용하자 9개월 만에 다시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박 당선자는 이때부터 대선 출마의 큰 뜻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당선자가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다. 박 당선자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 파문(차떼기 파문)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휘청거리던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 설치, 천안 연수원 매각 등 승부수를 띄운 끝에 121석을 얻어 단독으로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이후 박 당선자는 대표 재임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ㆍ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박 당선자가 공식적으로 대선을 노크했던 것은 2007년이다. 박 당선자는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치열하게 겨뤘다. 그러나 아쉽게 패하면서 비주류로 밀렸지만 이후 5년간 박 당선자는 MB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세론을 굳혀 나갔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때 / 연합뉴스
박 당선자가 당의 전면에 나선 것은 1년 전이다.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당은 휘청거렸고, 박 당선자는 비상대책위원장 자격으로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됐다.

박 당선자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만 해도 새누리당은 4ㆍ11 총선에서 120석도 얻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박 당선자는 특유의 뚝심과 원칙주의자의 이미지를 내세워 총선에서 원내 과반의석(152석)에 성공하며 "역시 박근혜"라는 찬사를 받았다.

워낙 대세론이 공고했던 터라 당내 대선주자로 확정되기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올해도 몇 차례도 위기는 있었다. 과거사 인식 논란, 불통 논란, 측근들의 금품 수수 의혹 등이 박 당선자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여기에 1년여 전부터 정치권의 상수(常數)로 떠오른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의 열풍에 휘말려 대세론도 한풀 꺾였다. 안 전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나설 경우 박 당선자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비관론도 나왔다.

박 당선자는 그러나 이런 모든 위기들을 넘기고 재수 끝에 대권 사냥에 성공했다. 박 당선자는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대통령 자격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정치 입문을 기준으로 하면 16년 만에 청와대의 주인이 된 것이다.

1998년 대구 달성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고 난 뒤 /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중앙선관위로부터 발부된 당선증을 전달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뒤 작성한 방명록.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