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 유통재벌가 2·3세 정식 재판 회부출장 등 이유로 국감 불응… 법정에 최소 2차례 나가야기업 이미지 타격 불가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아 검찰에 의해 약식기소 된 유통재벌가 2ㆍ3세들이 좌불안석이다. 법원의 직권으로 법정에 서게 된 때문이다. 이는 법원의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검찰의 약식기소는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번 정식 법정 회부 결정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동안 법원은 검찰이 약식기소한 사건에 대해선 벌금액을 조정하는 선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총수 일가는 벌금으로 국회 출석을 대신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법원의 조처로 이런 관행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법원의 결정이 최근 재벌 총수들에 엄격한 법적용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향후 재계에 대한 압박 수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판사들 사전 협의 거쳐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4일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약식기소된 , ,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부사장 등 4명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 부회장 남매 사건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이완형 판사가 먼저 정식 재판 회부를 결정했다. 그리고 신 회장과 정 회장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18단독 이동식 판사가 뒤를 이었다. 두 판사는 사전 협의를 거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벌금형으로 약식기소된 재벌총수 일가가 법원의 직권으로 법정에 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법원 관계자는 "재판부가 공소장과 증거서류 등을 검토한 결과 직접 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법원 관계자는 또 "가중처벌을 위해 정식재판에 회부한 것이 아니라 재판 진행절차상 필요했다"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악의적으로 국회에 출석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면 양형도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악의적일 땐 양형 달라져

앞서 유통재벌가 2ㆍ3세 4명은 지난해 대형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와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와 정무위 종합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됐으나 해외출장, 해외체류 등을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정 부회장 남매와 정 회장은 3번, 신 회장은 2번에 걸쳐 출석에 불응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이에 정무위 의원들은 정 부회장 등을 국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조치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신 회장을 시작으로 정 부회장과 정 부사장, 정 회장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그리고 검찰은 지난달 14일 이들을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열린 국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혐의로 각각 벌금 400만~7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국회에서의 증언ㆍ감정 등에 관한 법률은 증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 등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당시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일었다. 이들은 "몇백만원의 벌금으로 면죄부를 쥐여줬다"고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에 검찰은 "정 부회장 등은 해외출장 때문에 국감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는데 출장 일정이 언제 잡혔는지, 그룹 오너가 꼭 가야 하는 출장이었는지 등을 고려해 약식 기소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국감에 불출석했던 증인에 대한 과거 처벌 사례에 비춰볼 때 특별히 가볍게 처벌한 것은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벌금으로 면책 관행에 변화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
법원은 일반적으로 검찰이 약식기소한 사건에 대해 벌금액을 조정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직권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피고인이 무죄를 강하게 다투는 경우도 정식 재판 회부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정 부회장 등은 약식기소 단계에서부터 이미 대형 로펌을 선임, 국정감사 기간 중 해외출장 기록 등을 제출하면서 무죄를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재판부는 "유·무죄를 판단하기 위해선 정식 재판을 통해 사실 관계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식 재판에 회부되면 출석 의무가 없는 약식 재판과 달리 법정에 최소 2차례 이상 출석해야 하며, 검찰도 법정에 나와 공소 유지를 해야 한다. 정식 재판에 회부되면 사건은 새로운 재판부에 재배당된다.

물론 정식 재판에 회부된 사건의 선고 형량이 반드시 약식기소 당시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죄가 선고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유ㆍ무죄를 떠나 법정에 선다는 자체도 재벌가 2ㆍ3세들은 물론 해당 기업에 상당한 부담이다. 기업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기업 총수 일가는 국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되면 국외출장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는 사례가 많았다. 국정감사에 불려나가 망신을 당하느니 벌금을 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이번 법원의 조처로 대기업 총수 일가의 국회 출석 대신 벌금을 납부하는 관행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신세계ㆍ롯데ㆍ현대백화점 등은 말을 아끼고 있는 모습이다. "공식 입장이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재계는 "자칫 법원에 밉보였다 뜻하지 않은 철퇴를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편, 최근 법원은 재판 진행절차뿐만 아니라 양형에 있어서도 대기업 총수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실제,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등이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