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노하우로 글로벌기업 재도약1955년 제당사업 기반 20개 계열사 거느려보수적 경영방식 넘어 새로운 혁신사업 도전조용하지만 강한 변화

삼양사 사옥. 주간한국 자료사진
사람들은 만으로 예순살이 되는 해에 환갑잔치를 치른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인생의 한 주기를 잘 마친 것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환갑잔치를 벌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한다.

기업들의 평균수명은 사람들보다도 짧다. 30년 이상 무사히 생존하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특히 자본주의 도입이 늦은 데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무사히 환갑잔치를 하는 기업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만큼 1953년 이전에 창립, 지금까지도 위세가 당당한 기업들은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환갑을 넘긴 진정한 '장수기업'들은 어떻게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며 지금까지 왔을까? 도전과 혁신(두산), 효자상품(동화약품), 안정적 재무구조(한국도자기), 끊임없는 연구개발(한국타이어), 윤리경영(유한양행) 등 장수비결은 제각각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기업철학'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924년 기업형 농장 설립

1924년에 태어나 올해로 89세가 되는 삼양사의 창업주는 수당 김연수 선생이다.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국내 농지들을 수탈했던 시절, 김 창업주는 호남 일대 토지를 모아 국내 최초의 기업형 농장인 삼수사(삼양사 전신)를 세웠다.

김윤 회장.
창업 8년째인 1931년 삼양사로 사명을 변경한 김 창업주는 1936년부터 만주일대에 조선 농민들을 이주시켜 개간사업을 벌이고 1939년에는 만주에 '남만방적'을 세웠다. 남만방적은 최초의 국외 공장으로 기업사에 족적을 남겼다. 이 시기 삼양사는 국내 최초의 민간 장학재단인 양영회(양영재단 전신)를 세우기도 했다. 친일행적 논란에도 불구 김 창업주가 대표적인 근대적 기업가로 꼽히는 것은 이러한 성과들 덕분이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만주에서 철수한 삼양사는 주한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설탕이 전부였던 1955년 울산 제당공장을 준공, 제당사업에 뛰어들었다. 삼양설탕은 1970년대까지 최고의 명절 선물로 인기를 끌었던 히트상품이었다. 1956년 주식회사로 출범한 이후 삼양사는 농업자본에서 근대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다.

1968년 기업공개를 한 삼양사는 1969년 전주에 폴리에스테르공장을 세우며 화학섬유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화학섬유사업은 제당사업과 함께 1970년대 삼양사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운 양대 축이 되었다. 이후 삼양사는 1984년 선일포도당을 인수해 전분당기업인 삼양제넥스를 세우고 1988년에는 고순도 텔레프탈렌산업체인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1990년대 사업구조 고도화를 추진하고 1999년 4월 마침내 대규모기업집단으로 선정된 삼양사는 현재 식품사업, 화학사업, 의약품사업 등 총 20개(국내 15개, 국외 5개)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20년만에 기업설명회

'우보(牛步)경영.' 삼양사의 경영방식을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고 김상홍 명예회장이 오랫동안 취해온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경영방식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한때 '잘 나가는' 기업이었으나 소극적인 투자로 성장동력을 놓쳐 지금에는 '별 볼일 없는' 중견기업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담겨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안정적인 재무구조와 무리 없는 영토확장 덕분에 수많은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지 않았냐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김 명예회장이 '수성(守城)'에 강했다면 현재 삼양사를 이끌고 있는 김윤 회장은 좀 더 진취적인 경영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평이다. 김 회장은 사장을 맡았던 1996년부터 실적이 저조한 금융업과 통신사업을 정리하고 화학ㆍ식품ㆍ의약ㆍ신사업 등 4대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군으로 재편하는 등 삼양사에 자신의 색을 입히고 있다. 201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해 20여 년만의 기업설명회를 가진 것도 삼양사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올해는 삼양사가 글로벌 연구ㆍ개발(R&D) 혁신기업으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비전 2015'를 발표한 지 3년째 되는 해이다. 삼양사는 2015년까지 화학, 식품, 의약의 3대 핵심사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혁신을 통한 차별화로 강력한 시장 리더십을 확보하며,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도전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할 계획을 세운 바 있다. 구순(九旬)을 앞둔 삼양사의 조용하지만 깊은 변화가 기대된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