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리로 돌아온 '민주당' 통해 본 한국정당 변천사

60년 전통의 민주당이 돌고 돌아 다시 민주당이 됐다. 과거 민주당 현판식 때 문희상 박상천 김원기(오른쪽부터) 등 당내 주요인사들이 주먹을 불끈 쥔 채 '필승'을 다짐하고 있다.
평민당·새천년민주당 등 주요선거 앞두고 명찰 바꿔
새정치국민회의 사상 첫 여야 간 수평적 정권 교체
2004년 이후 분열 거듭… 벼랑끝 위기 돌파 여부 눈길

1981년 민정당 전신
민자당·신한국당 거쳐 1997년 한나라당으로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로 위기감 커져
새누리당 교체후 승승장구

민주통합당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왔다. 민주당은 지난 29일 당무위원회 회의를 열고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다. 민주당은 1955년 창당한 민주당의 후신으로 60년 전통을 자랑한다.

이에 앞서 지난 25일 민주당은 심야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당명에서 '통합'을 빼기로 했다. 민주당은 "그동안 시민사회와 통합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민주통합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며 "이제는 통합이 충분히 이뤄졌다는 판단에서 전통이 살아 있는 이름인 민주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은 제18대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 12월 민주당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등 진보세력을 아우르는 민주통합당으로 몸집을 불렸다. 대선 승리를 목표로 범야권이 한데 어우러진 만큼 '통합'이 지상 최대 과제였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그러나 지난해 두 차례 주요 선거에서 민주당은 잇달아 고배를 들었다. 한명숙 전 대표가 이끌었던 제19대 총선에서는 "과반 의석은 너끈할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과반 의석을 새누리당에 내준 채 제2당에 만족해야 했다.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지독한 계파패권주의에 갇혀 있던 민주당은 대선 정국에서도 '후보 단일화=필승'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에 매몰됐던 탓에 정권 탈환에 실패했다. 대선 역시 친노(친 노무현) 진영이 주도했다.

대선 패배 후 친노 주류 측 인사들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지자 민주당은 중도 성향의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박기춘 원내대표 체제로 당을 전환했으나 지지부진하기는 매한가지다. 민주당은 지난 4ㆍ24 재보선 때는 제대로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등 들러리로 전락한 채 씁쓸한 입맛만 다셔야 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5ㆍ4 전당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마당에 당명 개칭도 쇄신의 일환"이라며 "아직은 앞서가는 이야기이지만 만일 안철수 신당이 뜨고 나중에 민주당과 합당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다시 당명이 바뀌지 않겠냐"고 말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 합당

2000년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은 지난해 2월 새누리당으로 간판을 바꿨다. 1997년 11월 신한국당에서 개명한 지 14년 3개월 만에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선거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새 명찰을 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2011년 10월26일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로 극도의 위기감에 휩싸인 여당은 같은 해 12월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옹립하며 체제 정비에 나섰고, 당명 개명으로 쇄신 작업을 일단락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은 민주정의당(민정당ㆍ1981년) 민주자유당(민자당ㆍ1990년) 신한국당(1995년)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들이다. 그렇게 따지만 새누리당의 역사는 올해로 33년째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배출했던 민정당은 '여소야대' 구도 극복과 함께 호남 고립을 목적으로 정계 개편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90년 1월에는 민정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 세 사람이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본질이 다른 세 계파가 물리적으로 결합한 민자당은 출범 초기부터 극심한 내분과 함께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애초 화학적 결합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지난해 2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새누리당' 현판을 직접 달고 있다. 주간한국자료사진
툭하면 삐걱거리던 민자당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잠시 갈등을 봉합하는 듯했으나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있었다.

집권 중반기에 민심 이반이 극에 달했다는 판단에 따라 김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1995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여기에는 3당 합당의 잔재를 털어내겠다는 김 대통령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신한국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신한국당은 '대쪽 이미지'로 선풍을 일으켰던 이회창 후보를 대선후보로 선출하면서 정권 재창출 기대감도 키웠다.

그러나 아들 병역문제와 경선 주자였던 이인제 후보의 탈당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 후보는 15대 대선을 한 달 앞둔 1997년 11월 조순 '꼬마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를 통해 간판을 한나라당으로 교체했다.

한나라당은 97년 대선에 이어 2002년 대선에서도 민주당에 패했으나 2007년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권 탈환에 성공했고, 지난해에는 간판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뒤 박근혜 후보의 승리를 만들며 정권 재창출을 이뤘다.

1995년 신한국당
김대중파-친노 열린우리당

민주당은 스스로에 대해 "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야당"이라고 한다. 60년의 기준은 1955년 태동한 민주당이고,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기치를 세운 이승만 김구 등의 한국민주당, 신익희 조병옥 등의 민주국민당(1949년)도 민주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가깝게 보면 사상 최초 5년 직선제였던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창당한 평화민주당이 민주당의 뿌리다. 평민당과 경쟁하던 통일민주당은 김영삼 총재가 1990년 보수 연합에 동참함으로써 야당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거대한 보수 연합 틈바구니에서 제1야당으로 자존을 지켜온 평민당은 새정치국민회의(1995년) 새천년민주당(2000년) 등 주요 선거를 앞두고 수혈과 함께 옷을 갈아입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민주당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간판이었다. 국민회의는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4수에 나선 김대중 후보에게 승리를 안김으로써 사상 첫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1990년 민주자유당
국민회의는 으로 간판을 바꿨고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이후 김대중 대통령 직계인 동교동계와 노무현 대통령 지지 세력인 친노 진영이 대립한 끝에 2003년 열린우리당이 태어났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대통령 탄핵 사태의 반사이익으로 152석의 공룡이 됐지만 노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 계파 간 갈등 등으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2002년 대선에서 57만 표 차로 이겼던 민주당은 5년 뒤인 2007년 대선에서는 530만 표 차로 패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후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친 끝에 2010년 민주당으로 돌아왔고, 제18대 대선 1년 전이던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이 됐다.

민주당은 가장 가깝게는 2010년 이후 3년 만에, 가장 멀게는 1955년 이후 58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새 지도부 선출과 함께 당의 간판을 바꾼 민주당이 끝없는 추락에서 벗어나 제1야당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956년 조봉암 효시… 민주화 항쟁이후 다시 기지개… 현재는 많이 위축


●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최경호기자

미국은 양당 체제의 대표적인 나라다. 그 외 정당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존재감이 너무 희미하다. '미국' 하면 으레 민주당과 공화당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미국에서 민주-공화 양당 체제가 구축된 것은 1850년대다. 지금과는 반대로 당초 민주당은 노예 해방에 반대하는 보수 정당으로, 공화당은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개혁 성향의 정당으로 출발했다. 유럽의 관점으로 보면 민주-공화 모두 보수 정당이다.

한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체로 새누리는 보수, 민주는 진보로 분류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양당 모두 보수에 가깝다. 특히 지난해 대선 때 새누리가 경제민주화 등 야당 몫의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양측의 경계는 더 모호해졌다.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은 1956년 11월 창당된 진보당이 효시다. 진보당은 제3대 대선에서 조봉암 후보가 216만 표를 얻은 결실을 바탕으로 1956년 민주사회를 표방하며 깃발을 세웠다.

그러나 1958년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 외 진보당 간부 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진보당의 당 등록을 취소했다. 이후 1960년 4ㆍ19혁명을 계기로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이 창당돼 국회의원까지 배출했으나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로 해산되거나 제도권 아래로 가라앉았다.

박정희 정권 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진보정당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다시 기지개를 켰고, 민중의 당, 한겨레 민주당, 민중당, 한국노동당, 국민승리21, 청년진보당 등의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승리 21은 민주노총 위원장이던 권영길 대표를 1997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1.3%를 얻었다. 국민승리 21은 2000년 민주노동당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2년 대선에서 권 후보를 다시 내세워 3.9%를 획득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6ㆍ13 지방선거에서 정당득표율 8.13%로 자유민주연합을 제치고 제3당으로 뛰어올랐고, 2004년 4월 총선에서도 10석을 차지하며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에 이어 3당에 올랐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분열을 면치는 못했다. 노선 갈등 끝에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은 민주노동당을 나와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일부가 모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이들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진보신당에 남았다.

지난해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진보신당은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저조한 득표율(1.13%) 때문에 정당 등록이 취소된 진보신당은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총선 직후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부정 논란으로 국민참여당 인천연합 새진보통합연대 출신들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탈당파인 노회찬 심상정 등은 진보정의당을 결성했고, 이정희는 통합진보당에 그대로 남아 당을 이끌고 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