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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그룹 유보율 1442% 사상최대… 꽉 닫힌 곳간 열 특단 대책 필요

● 도 넘은 대기업 '돈 쌓기'
4년 만에 548%P나 늘어
롯데그룹 14,208% 최고… SK그룹 5,925%로 2위
각종 규제완화로 투자 유도
적정 유보율 초과 부분은 법인세 등 강력 압박해야
  • '유통공룡' 롯데그룹의 유보율이 지난 4년간 무려 11배나 증가하며 눈길을 끌었다. 사진은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그룹 본사. 주간한국 자료사진
불과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할머니들은 쓰다 남은 돈이 생기면 장롱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예사였다. 돌돌 말아 고무밴드로 동여 놓은 지폐뭉치를 옷가지 속에 숨겨놓고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렸던 것이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지만 일단 장롱 안에 넣어놓으면 최소한의 안정성은 보장할 수 있으니 겁 많은 우리네 할머니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라 느꼈을 수도 있겠다. 대통령권한대행 시절인 1962년 6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롱 밑에 잠자고 있는 음성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요즘 대기업들을 보면 장롱 속에 지폐 뭉치를 꼭꼭 숨겨놓는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경제불황, 경제민주화 압박 등의 대내외적 조건만을 탓하며 내부에 돈을 쌓아두는 데 급급한 모습들 때문이다.

대기업들은 "무분별한 정부 규제가 투자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역대 어떤 정권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정책을 폈던 이명박(MB)정부 시절을 거치며 유보율이 오히려 올라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또한 수긍하기 어렵다. 실제로 10대 그룹의 2012년 유보율은 MB정부 첫해인 2008년과 비교해 무려 61%나 늘어나며 이를 방증했다.

돈 돌지 않고 묶여 있어

국내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의 유보율이 1,400%를 돌파했다. 사상 처음으로 1,000%를 돌파했던 것이 2009년 3분기 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 SK텔레콤은 지난해 34,372%의 유보율을 기록하며 656개 상장사 중 3위를 차지했다. 사진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SK그룹 본사. 주간한국 자료사진
유보율이란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이익인 이익잉여금과 자본 거래 등 영업활동이 아닌 특수거래에서 생긴 이익인 자본잉여금을 합한 금액을 납입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이다. 기업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량을 측정하는 주된 지표로 한 마디로 표현하면 벌어들인 돈을 내부에 얼마만큼 쌓아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보율이 높으면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자사주 매입, 배당 등을 위한 자금여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투자 등 생산적인 부문에 돈이 흘러들어 가지 않고 고여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4월 3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및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10대 그룹 소속 12월 결산법인 69개사의 2012년 유보율은 1,442%로 집계됐다. MB정부 첫해인 2008년 10대 그룹의 유보율은 894% 수준이었다. 매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불과 4년 만에 548%p나 높아진 것이다. 지난해 10대 그룹 상장계열사의 자본금은 28조1,100억원으로 2008년의 25조4,960억원 대비 10.3%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잉여금은 같은 기간 235조5,589억원에서 405조2,484억원으로 72.0%나 늘어난 것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10대 그룹은 비(非) 10대 그룹과 비교해도 유보율이 현저히 높았다. 전체 656개 상장사 중 10대 그룹 계열의 69개사를 제외한 587개사의 유보율은 591%에 그쳤다. 1,442%를 기록한 10대 그룹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그룹들일수록 돈을 꼭꼭 숨겨두고 꺼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4년 만에 11배 증가 롯데그룹

그룹별로 살펴보면 유통공룡으로 불리는 롯데그룹의 유보율이 14,208%로 가장 높았다. 롯데그룹의 2008년 유보율이 1,277%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4년 만에 11배나 늘어난 것이다. 롯데칠성음료, 롯데제과 등 주력 계열사들의 유보율이 각각 26,117%, 23,221%로 높았던 것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읽힌다.

유보율 2위는 SK그룹이 차지했다. SK그룹의 지난해 유보율은 5,925%였다. SK그룹 또한 롯데그룹과 마찬가지로 지난 4년간 유보율이 크게 상승했다. 2008년의 SK그룹 유보율은 1,310%에 불과했다.

포스코그룹은 2,410%의 유보율을 기록하며 SK그룹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포스코그룹은 지난 4년간 유보율이 오히려 떨어지며 눈길을 끌었다. 2008년 당시 포스코그룹은 5,844%의 유보율로 10대 그룹 수위에 자리잡은 바 있다. 그러나 MB정부 동안 크고 작은 인수ㆍ합병을 거치며 잉여금을 남발한 끝에 유보율도 크게 하락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그룹(2,276%), 현대중공업그룹(2,178%), 현대차그룹(2,084%) 등이 뒤를 이었다.

10대 그룹 중 유보율이 가장 낮은 곳은 한화그룹이었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568%의 유보율 기록했다. 2008년 당시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밀려 10대 그룹에 속하지 못했었다. 한진그룹도 589%로 유보율 최하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한진그룹은 포스코그룹과 마찬가지로 지난 4년간 유보율이 하락했다. 2008년 608% 수준이었던 한진그룹의 유보율은 4년 동안 19%p 하락했다. 몇 년째 계속된 실적악화의 여파를 크게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 밖에 GS그룹(844%), LG그룹(893%)도 상대적으로 낮은 유보율을 기록한 그룹 명단에 올라있다.

SKT 유보율 상장사 전체 3위

그렇다면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들의 유보율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주간한국> 조사 결과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 중 유보율이 가장 높았던 곳은 SK텔레콤이었다. SK텔레콤의 2012년 유보율은 무려 34,372%였다. 자본금대비 무려 344배의 잉여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사 대상에 포함됐던 656개 상장사 중에서도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45,370%), 태광산업(39,478%)에 이어 3위에 오를 정도의 높은 수치다. SK텔레콤은 2008년에도 27,933%라는 높은 유보율을 기록한 바 있다.

SK텔레콤의 높은 유보율은 여타 대표 계열사에 비해 확연히 낮은 자본금 때문으로 해석된다. SK텔레콤의 자본금은 446억원으로 현대자동차(1조4,890억원), LG전자(9,042억원)는 물론이고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 중 하위그룹인 롯데쇼핑(1,452억원), GS건설(2,550억원)에도 훨씬 못 미친다.

삼성전자도 높은 유보율을 기록하며 SK텔레콤의 뒤를 이었다. 삼성전자의 2012년 유보율은 12,224%로 2008년(6,909%)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자본잉여금은 오히려 줄어들었지만, 이익잉여금이 55조4,161억원에서 105조3,065억원으로 크게 늘어나며 유보율도 수직상승했다.

삼성전자의 늘어난 이익잉여금 중 눈에 띄는 부분은 기업합리화적립금, 시설적립금 등이다. 2008년 9조5,121억원에 불과했던 기업합리화적립금은 지난해 16조5,121억원으로 7조원이나 늘어났다. 같은 기간 시설적립금도 8조8,169억원에서 21조8,676억원으로 대폭 상승했다. 업무 프로세스 개선이나 비용절감을 위한 합리화 등에 사용되는 기업합리화적립금과 신규 생산시설 확충을 위한 시설적립금이 많이 쌓여있다는 것은 업황 변화에 대한 대응폭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자금이 적체돼있다고도 볼 수 있다.

롯데쇼핑도 유보율이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한다. 2008년 5,961%였던 롯데쇼핑의 유보율은 지난해 9,645%까지 상승했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이익잉여금의 상승폭(4조49억원→10조3,514억원)이 자본잉여금의 하락폭(4조6,509억원→3조6,538억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컸던 까닭이다.

롯데쇼핑의 이익잉여금 상승은 임의적립금이 대폭 늘어난 것의 영향을 받았다. 2008년 3조801억원에 불과했던 롯데쇼핑 임의적립금은 지난해 9조1,601억원까지 올라갔다. 임의적립금이란 기업이 법률의 규정에 따르지 않고 정관 또는 주주총회의 결의에 의해 이익을 유보한 것으로 이용목적과 방법이 자유롭다. 말 그대로 곳간에 쌓여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예비자금인 것이다.

10대 그룹 대표 계열사 중에서는 유독 대한항공의 유보율만이 낮아졌다. 2008년 571%였던 대한항공의 유보율은 지난해 556%까지 하락했다. -9,159억원이었던 이익잉여금이 1조8,476억원까지 늘어난 데 반해 3조88억원이던 자본잉여금이 1,911억원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자본잉여금 하락에는 2008년 포함됐던 재평가적립금 2조8,159억원이 2011년부터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평가적립금이란 매입 당시의 가격으로 토지, 건물 같은 자산을 재평가해 장부에 표시하는 것으로 항공기 자산이 많은 대한항공 또한 자본잉여금이 대폭 늘어나는 효과를 봤다. 줄어든 재평가적립금은 2011년 이후 이익잉여금으로 계정 재분류됐으나 그 규모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고강도 강제성 필요

10대 그룹을 비롯해 대기업들의 유보율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나오는 해명 또한 획일적이다. 대기업 측은 자사 경제ㆍ경영연구원 관계자들의 입을 빌려 "경기 전망이 어두워 투자처를 찾기 어려우니 정부가 규제완화, 세제혜택 등의 지원을 강화하라"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대기업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금융 전문가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사내유보금을 필요 이상으로 쌓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다. 당시 재계 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을 비롯해 수많은 회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불확실성'에 대한 대기업들의 민감도가 확장, 자연스레 보수적인 경영방식을 고수하게 됐다는 것이다. MB정부가 들어선 2008년에는 금융위기까지 겹치며 대기업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유보율에 '현금'만이 아닌 공장, 설비 등도 포함된다는 지적도 일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 같은 대기업들의 '버티기'가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 '압박용'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는 대선 당시 주요 화두였던 '경제민주화' 바람이 새 정부 출범 이후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반발로도 읽힐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마디로 "우리 돈을 끌어내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기업들의 의도는 상당 부분 먹혀 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 측은 대기업의 투자부진 해소를 위해 강도 높은 규제 완화 정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또한 4월 29일 "규제 개선 중심의 투자 활성화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그동안 끌어왔던 수도권 입지 규제 완화, 인천 송도 경제자유구역 내 공장 신설, 경기 동부권 역내 대기업 공장 증설 등에 대한 논의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규제완화책만으로는 대기업들의 잉여자금을 더 이상 끌어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역대 정권 중 대기업들의 규제를 가장 많이 풀어주며 대놓고 밀어줬던 MB정부 동안에도 급상승한 유보율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소속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새 정부의 정책을 관망하는 기업들이 많을 것"이라며 "단순히 세제혜택, 규제완화 등 그간 반복적으로 해왔던 정책만으로는 숨겨진 자금을 끌어내기 어렵지 않겠냐"고 지적했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기업들이 돈을 쓰게 하려면 풀어주지 말고 오히려 더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라도 적정유보율을 초과한 부분에 대해 법인세를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도 투자와 고용, 경제선순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과다유보율에 대해서는 강력히 과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지폐뭉치를 꺼내기 위해 노력했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제2의 화폐개혁'에 준하는 강력 정책을 펴나갈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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