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창중 파문'으로 본 청와대 대변인의 세계

이동관
전 문화공보부 장관 사실상 '박정희 입' 역할
참여정부 '홍보' '공보' 분리… 홍보수석-대변인 체제로

"한일합방 100주년" 부적절한 표현으로 도마위
'워치콘' 발언 파장… 남북관계 급속히 냉각

출퇴근시간 불규칙하고 상대할 기자 점점 늘어나
YS정부 대통령 튀는 발언 뒷수습하느라 진땀 빼기도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입'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57) 전 청와대 대변인이 박 대통령 취임 후 첫 방미(訪美) 기간에 주미 대사관 소속 교포 여성 인턴을 상대로 성추행 의혹 '사고'를 치는 바람에 급기야 대통령이 대 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이번 방미 일정 말미에 (윤 전 대변인의) 공직자로서 있어서는 안 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국민 여러분께 큰 실망을 끼쳐 드린 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성진
박 대통령의 사과는 지난 2월25일 취임 후 두 번째였다. 하지만 지난 4월21일 민주당 지도부와 만찬에서는 장관, 차관 등 고위 공직자들의 잇단 낙마와 관련된 것이어서 대국민 사과는 취임 후 이번이 처음이다.

윤 전 대변인처럼 청와대 현직 대변인이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정국을 뒤흔든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지만, 과거에도 대변인들의 설화(舌禍)나 부적절한 처신 등은 이따금 발생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청와대 대변인의 중량감이 좀 떨어진 것은 사실"이라며 "국민의 정부 때까지만 해도 정권의 핵심인사가 대변인을 맡는 게 관례였지만 이후로는 '격'이 낮아진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고 꼬집었다.

정권 따라 대변인 위상도 변화

역대 정권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이전에는 대변인제도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유명무실했고 홍보수석(김대중 정부 이전까지는 공보수석으로 불렸음)이 대변인을 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송경희
공식적인 대변인은 5ㆍ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역임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 때는 대변인이 있었으나 오늘날의 청와대 대변인역은 공보수석, 또는 문화공보부 장관이 담당했다. 전 문화공보부 장관이 대표적으로 그는 3공화국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정ㆍ관계에 입문, 공보수석과 대변인에 이어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당할 때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정권 핵심의 의중을 국민에게 전달해 '박정희의 입'으로 불렸다.

역대 청와대 공보(홍보)수석은 정무수석, 민정수석, 경제수석 등과 함께 청와대에서 가장 중요한 수석비서관 자리로 대통령의 대(對) 국민 메시지 등 이미지 관리를 총괄하는 한편 대 언론 관계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여서 폭넓은 인맥과 뛰어난 정무감각 등을 겸비한 인물들이 중용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 김학준 이수정을 비롯해 김영삼 정부 시절의 주돈식 손주환 이경재 윤여준 김대중 정부 때의 등 대변인들의 면면이 쟁쟁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들어 홍보수석과 대변인으로 홍보 업무가 이원화되면서 이들의 위상과 역할도 크게 달라졌다. 참여정부는 홍보수석은 이해성 이병완 조기숙 이백만(李百萬) 등으로, 대변인은 윤태영 김종민 김만수 정태호 윤태영 등으로 구성하는 등 철저한 '이원화'를 유지했다.

김은혜
출범 초 공보수석이라는 명칭 대신 홍보수석을 사용한 참여정부가 홍보수석과 대변인을 분리했던 것은 ▦홍보수석실의 정책 홍보 기능 강화 ▦개방형 브리핑제 도입 ▦출입 기자들의 비서동 출입 제한 조치 등과 연관이 있었다.

역대 정권에서 공보수석은 주로 대통령의 '입' 역할에만 충실했지만, 참여정부 때 홍보수석은 정책 홍보, 홍보 전략 수립 등 홍보 업무 전반을 관장했다.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 업무는 대변인이 전담했다. 다시 말해 '홍보'와 '공보' 업무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러던 참여정부가 임기 말에 접어들자 대 언론 창구 역할을 비롯한 모든 홍보 업무를 홍보수석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화된 시스템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이 같은 제도는 과거 정권 때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과거에는 '공보수석=대변인'이었던 반면 참여정부 말기에는 직제상 홍보수석과 대변인이 별도로 존립하되 한 사람이 두 직책을 동시에 맡게 했다.

MB 정부 이후로는 청와대 홍보 업무를 홍보수석과 대변인 이원화된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 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홍보수석과 대변인 간의 불분명한 업무 분장이라는 지적에 따라 공동대변인제가 폐지되고 대변인-부대변인 체제가 다시 도입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윤창중
대변인 실수, 정권 흔들 수도

대변인은 국민과 언론 매체를 통해 거의 매일 만난다는 점에서는 물질로는 환산할 수 없는 이점을 누린다. 대변인이 청와대를 떠난 뒤 각종 선거 등에 출마했을 때 '얼굴=명함'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변인제도는 정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현 정권처럼 공동대변인제도를 시행하기도 하고 대변인 아래 부대변인을 두기도 한다. 박 대통령은 전 대변인과 김행 대변인 2명을 새 정부 초대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대변인은 대통령의 발언과 주요 국정 현안을 국민에게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주요 정책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필수다.

따라서 수석비서관들, 보좌관들과 늘 함께 호흡해야 한다.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 명석한 이해력 그리고 순발력 등은 대변인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또한 대변인은 아나운서만큼은 아니더라도 정확한 발음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박지원
부단한 노력과 함께 끈임 없이 긴장하지만 대변인도 사람인지라 실수는 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실수가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라면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물론 윤 전 대변인 정도의 '사고'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MB 정부 때 전 대변인은 몇 차례 말실수로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의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인도와 스위스 순방길에 올랐을 때 딸과 손녀를 동행했다가 비난을 샀다. 이에 김 전 대변인은 "정상외교에서 대통령의 가족 동반은 국제적인 관례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다"고 주장한 뒤 '2008년 페루 동행' 사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특히 야당은 "그렇다면 인도 스위스 정상외교가 가족을 데려간 첫 번째가 아니고 그동안 국민들 모르게 가족을 데리고 정상외교에 참여했단 말이냐"며 강하게 비난했다.

'MB의 아바타'로 불렸던 전 홍보수석은 청와대 대변인 시절 '한일합방 100주년'이라고 표현했다가 진땀깨나 흘려야 했다. '한일합방'이라는 말 자체가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주년'이라는 것은 기념할 때나 쓰는 단어다. 이 전 대변인은 '한일합방'은 '한일강제병합'으로, '100주년'은 '100년'으로 정정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 전 대변인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하자 쇄신 대상으로 지목돼 청와대를 떠났다. 이 전 대변인은 지난해 총선을 통해 재기를 노렸으나 공천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준영
참여정부 시절 전 대변인은 말실수 때문에 70일 만에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송 전 대변인은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한 날 "전군에 경계령이 내려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워치콘(대북정보감시태세) 3'을 한 단계 높였다"고 답했다.

이에 기자들이 "데프콘(방어준비태세)이 아니냐"고 재차 질문하자 "군사나 작전에 관해 충분히 답변해드릴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 단계 올린 것은 맞느냐"는 후속 질문에 송 전 대변인은 "네"라고 답했다.

그렇지만 얼마 안 돼 송 전 대변인의 브리핑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다음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는 "노골적인 도전이며 참을 수 없는 적대 행위"라며 예정됐던 남북경제협력회의를 취소하는 등 남북관계를 급속도로 냉각시켰다.

긴장의 연속, 과중한 업무

참여정부 후반부이던 2006년 3월17일 당시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마이크'를 놓고 청와대에서 나왔다. 김 전 대변인이 쥐고 있던 마이크는 김만수 부대변인에게 넘어갔다.

박선숙
김 전 대변인이 밝힌 사퇴 이유는 건강이었다. 밤낮없이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건강이 많이 나빠졌고 좀 쉬고 싶다는 게 김 전 대변인이 밝힌 사퇴의 변이었다.

당시 조기숙 홍보수석은 "한 달 전 내가 왔을 때부터 이미 김 대변인이 사의를 표한 상태였지만 내가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자리를 지켜달라고 요청해 인사가 미뤄졌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변인에 앞서 같은 해 2월17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이병완 홍보수석이 채 1년도 안 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전 수석 역시 건강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에서 수년간 근무했던 한 관가 관계자는 "청와대 홍보 라인은 말 그대로 3D 업종이다. 출퇴근 시간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늘 긴장을 풀 수 없는 데다 걸핏하면 휴일에도 출근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업무도 갈수록 과중해지는 추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만 해도 청와대 출입기자는 80명 정도였다. 여기에는 중앙일간지, 지방신문의 취재기자에 카메라ㆍ사진기자까지 포함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도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규모는 이와 비슷했다. 반면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이보다 훨씬 숫자가 적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에 등록된 기자만도 300명을 넘었다. 기자단을 해체하는 대신 브리핑룸을 신설하면서 일간지나 방송사뿐 아니라 특수매체 기자들까지 청와대에 출입했다.

당시 홍보수석실은 수석비서관 밑에 홍보기획, 국정홍보, 국내언론, 해외언론비서관실을 뒀다. 이와 별개로 대변인팀이 있었고 여기에는 대변인, 부대변인, 보도지원비서관(춘추관장) 등이 포함됐다.

특히 춘추관에 상주하면서 기자들의 취재에 응대하는 사람들은 대변인팀 소속으로 불과 10명 정도가 300명 이상을 상대해야 했다. 그만큼 청와대 홍보 업무가 힘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민정부 시절 공보수석실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풀지 못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튀어도 너무 튀는 발언을 수습하느라 공보수석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일본을 향해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던 게 대표적인 김 전 대통령의 '튀는 발언'이었다.

반면 국민의 정부 때는 비교적 홍보 업무가 '수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말을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해도 그 자체로 기사가 될 정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언변은 논리정연하고 깔끔했다. 김 전 대통령은 연설 담당 비서관이 작성한 원고에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보태는 스타일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홍보 업무라고 할 게 거의 없었다. 출입기자도 얼마 안 됐을 뿐 아니라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터라 청와대에서 출입기자는 물론이고 언론사 인사에까지도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때는 업무 방해 방지와 보안 유지 등의 이유로 비서동(棟) 취재가 제한되면서 기자들의 원성을 샀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때만 해도 오전과 오후에 1시간씩 비서동이 개방돼 취재진과 비서들이 자연스럽게 정보와 친분을 함께 나눴다.

국민의 정부 '3朴자' 맞았다


··, 기자들과 돈독한 관계

최경호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의 언론 담당은 주로 3박(朴)이 맡았다. 3박은 민주당 의원, 전남지사, 전 의원이다.

김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공보수석이 전 중앙일보 기자(현 전남지사)를 발탁해 국내언론비서관 업무를 맡겼다. 비서관은 훗날 자연스럽게 수석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수석은 국민의 정부 때 정책기획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기자들과의 스킨십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언론의 달인'이라는 말도 괜한 게 아니었다.

박 수석이 참여정부 들어 대북 송금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고초를 겪을 때 강도 높은 비판 기사가 거의 없었던 이유도 박 수석과 기자들의 인간적인 친밀감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대변인은 공보수석 아래서 성장했다. 대변인은 수석 밑에서 공보기획비서관, 부대변인 등을 지내다 공보수석으로 승진했고 참여정부 때는 환경부 차관에까지 올랐다.

수석뿐 아니라 국민의 정부 '3박'은 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과 공보수석실에 근무했던 참모들은 '청춘회(청와대+춘추관)'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었고 정기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세배도 갔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