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사외이사 관료 출신 급증20대 재벌 신규 선임자 30% 법조계·국세청·공정위 출신검찰·법원 17명 가장 많아대부분 정부 규제에 대한 로비 통로로 활용

권력기관 고위급 출신 인사들이 재계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 재계관련 사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새로 선임된 사외이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법조계나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등 핵심 권력기관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안팎에선 '힘 있는 사외이사'들을 주로 선임하는 이유에 대해 '로비용' 내지는 '방패막이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많다. 특히 새정부가 경제민주화에 속도를 내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관료 늘고 학계 줄어

사외이사는 오너와 관련 없는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다. 한국에선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사외이사를 처음 도입, 의무화하고 있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 기업이 대상이다.

초창기만 해도 주로 학계, 시민단체 등의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사외이사진을 고위급 관료 출신들로 구성하는 게 관행이 돼 버렸다.

이런 현상은 최근 더욱 극명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새 정부가 경제 민주화에 속도를 내면서 기업들이 사정기관의 '신세'를 질 일이 많아 질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다.

재벌 및 CEO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최근 주주총회에서 신규 선임한 20대 재벌기업 149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현황을 분석한 결과 관료 출신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반면 학계와 재계 인사는 대폭 줄었다.

실제, 올해 주주총회에서 새로 선임된 20대 그룹 상장사 사외이사 94명 중 30%가 넘는 29명이 법조계와 국세청, 공정위 등 이른바 3개 권력기관 출신이었다. 부처별로는 검찰 법원 등 법조계 출신이 17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국세청 9명, 공정위 3명 순이었다.

법조 출신의 경우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삼성전자에,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은 GS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이 대표적이다. 삼성전기는 이승재 전 해양경찰청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국세청 출신 중에는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SK텔레콤 사외이사로 선임됐고, 박찬욱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은 현대모비스, 이승재 전 중부지방국세청장은 현대건설,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김갑순 회계법인 딜로이트코리아 부회장은 CJ제일제당 사외이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공정위 출신으로는 정호열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현대제철에, 손인옥 전 공정위 부위원장은 신세계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이 눈에 띈다.

이들 외에 청와대, 국무총리실, 국가정보원, 기획재정부, 감사원, 고용노동부, 금융감독원, 방송통신위원회, 경찰청 등 수십 개 부처 관료 출신 사외이사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51명으로 전체의 53.3% 달했다.

이번 신규 선임에 따라 힘 있는 사외이사의 비중은 지난해 말보다 높아졌다. 먼저 법조계 출신 인사 비중은 3.8%p 높아졌고, 국세청과 공정위 출신 비중도 각각 3.5%와 1.2%p 높아졌다.

반면, 학계나 재계, 언론, 예능 출신 사외이사 비중은 큰 폭으로 하락했다. 학계 출신은 올해 25명이 선임돼 수적으론 가장 많았다. 하지만 전체 신규선임자 대비 비율은 지난해 말 34.6%에서 26.6%로 8%p나 낮아졌다.

이처럼 기업들이 관가 인사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재계에선 '보험용' 내지는 '로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많다. 재계에선 "고위급 관료를 얼마나 영입했느냐가 해당 회사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현재 경영감시라는 취지로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대기업들은 이사회가 갖는 무게감을 외부에 과시하고 규제 이슈에 대한 로비 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권력기관 출신을 사외이사로 임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사외이사 제도가 취지와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외이사들이 이처럼 제구실을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와 관련해서는 사외이사 선임구조와 무관치 않다는 견해가 많다.

사외이사는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주주총회가 선임하게 돼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오너, 대주주, 최고경영자, 기존 이사가 사실상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결국 회사와 오너의 권익을 위해 힘 써줄 인물이 선임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외이사가 제기능을 하려면 지배주주가 전권을 휘두르는 선임 구도를 바꿔야 한다"며 "대주주 입김을 최대한 배제하고 공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 학계 출신 35명 최다… 법조인도 9명


● 대기업별 사외이사 출신 분포
현대기아차 세무 8명·공정위 7명… 신세계 학계 '0'

송응철기자

대기업 가운데 학계 인사와 관료를 가장 많이 선임한 곳은 어딜까. 재계 순위가 높을수록 학계 인사가 많고, 낮을수록 관료 출신이 많은 경향이 나타났다.

학계 인사가 가장 많은 건 단연 삼성그룹이었다. 삼성그룹은 사외이사 58명 중 학계 인사가 35명에 달했다. 관료는 15명이었다. 관료 중에선 법원이나 검찰 등 법조계 인사가 9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현대기아차그룹은 43명의 사외이사 중 학계 출신이 19명이었다. 반면 관료 출신은 2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서도 세무와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출신이 각각 8명과 7명으로 20대 그룹 중 가장 많이 포진해 눈길을 끌었다.

롯데그룹은 학계 출신이 5명에 불과했다. 관료는 법조계 7명, 국세청 5명을 포함 총 17명이었다. 두산의 경우 총 26명중 법조계 출신 8명을 포함 관료 출신이 17명(65.3%)에 달했다. CJ도 26명 중 관료 출신이 18명으로 69.2%나 됐다.

신세계는 학계 출신이 단 한 명도 없었다. 17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88.2%에 해당하는 15명을 관료 출신들로 구성했다. 동부그룹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20명의 사외이사 가운데 13명이 관료 출신이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