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속한 고령화의 서글픈 자화상사회 안전망 극히 취약해 배우자 간병살인 후 자살10년새 노인 자살 3배 급증… 미국 5배·영국 20배 달해사회전체가 고통 분담해야

경기도의한사회복지관 직원이 치매 노인을 부축해 돌봄센터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경제·신체적 문제로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인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아직 미진한 실정이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모(82) 할아버지 부부는 온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폐지를 줍는 게 일이다. 많이 벌어야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20만원도 채 안된다. 여기에 월 15만원꼴로 나오는 정부 지원금을 합쳐봐야 35만원. 노부부의 생활비 전부다. 그래도 비바람을 피할 손바닥만한 집 한 채가 있고 말동무를 해줄 서로가 있어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최근 할머니의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 무릎과 허리의 통증을 호소하며 일어나지 못하는 나날이 길어졌고 건망증도 심해졌다. 김 할아버지는 "자식들과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심정"이라며 "혼자 되는 것이 두려워 그냥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리는 어르신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황혼의 여유나 선진 노인복지, 든든한 사회안전망 등과 같은 얘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에게 메아리 없는 구호일 뿐이다. 노인 자살은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 자살률 증가를 이끄는 강력한 견인차로 떠올랐지만 브레이크 기능을 담당할 명쾌한 대책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노인 자살, 전체의 27%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11년 1만5,000여명에 이르는 자살 사망자 가운데 만 65세 이상 노인 자살 사망자는 4,406명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다. 자살자 4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우리나라 노인의 자살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2009년 OECD가 조사한 한국 노인(65~74세)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81.8명으로 미국(14.1명)의 5배, 영국(4.8명)의 20배 수준이다.

증가 추세 역시 가파르다. 2001년 1,448명이던 노인 자살자 수는 10년 만인 2011년 4,406명으로 세 배가량 늘어났다. 같은 기간 15~64세 연령대의 자살자 수는 두 배 늘어나는데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상치 않다.

노인들이 직면한 힘든 현실은 자살자 수의 증가뿐 아니라 병든 배우자나 가족을 돌보다 지친 나머지 상대를 살인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간병 살인ㆍ자살 등의 현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올 5월 서울남부지법에서는 치매에 걸린 남편의 머리를 가정용 변압기로 내리쳐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모(71) 할머니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이 할머니는 법정에서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며 자신에게 수차례 욕설을 하고 괴롭히는 등 의처증이 심해졌다"며 "견디기 힘들어 죽이려고 했다"고 눈물로 고백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할아버지가 증언 영상으로 "제 처가 저를 죽이려 했다는데 그런 말 듣지 말고 용서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배심원단과 재판부는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상해에 대해서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같은 달 경북 청송에서는 80대 노부부가 저수지에 차를 몰고 들어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 치매를 앓던 부인을 묵묵히 4년간 돌보던 남편은 "내가 먼저 죽고 나면 아내가 요양원에 가야 하니 내가 운전이라도 할 수 있을 때 같이 가기로 했다. 미안하다"는 유서만을 남겼다.

극단 적인 선택 이유는?

노인들이 자살과 살인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이유는 몇 가지로 압축된다.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자살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 ▦건강 등 신체 질환 문제 ▦외로움ㆍ고독 ▦가정 불화 등이 꼽힌다.

전문가들은 결국 이런 문제점 대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급속한 고령화와 관련이 깊다고 분석한다.

현재 65세 이상인 노인들은 의학 발달과 식습관 개선 등의 이유로 기대여명이 80세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연장된 삶에 대한 육체적ㆍ정신적ㆍ경제적 준비는 극히 부족한 경우가 대다수다.

이미 쇠약해진 육체로는 일을 계속하기 어렵고 생활은 점점 빈곤해져간다. 하지만 자녀들은 과거 자신과 달리 나이든 어르신들을 보살피며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노화 현상이 진행됨에 따라 가벼운 일상 행동에서도 신체적 한계를 느끼는 상황은 만성적인 우울감을 가져다준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삶의 가치에 대한 욕구는 커지는 반면 사회적인 성취는 젊은 시절만큼 이루기 힘들다"며 "이러한 괴리에서 오는 우울감이 많은 노인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노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과 핵가족화 등에 따른 가족 해체도 대부분 선진 국가가 겪는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노인 자살 사망자 수가 유독 많은 것은 서구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노인을 위한 우리의 사회안전망이 극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안용민 자살예방협회장(정신과 전문의)은 "한국 노인의 자살률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 거주하고 홀로 살아가는 독거노인일수록 높아지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현재 우리는 사회 전체가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문제를 개인이나 가족에게 지우고 있으며 이 같은 부담이 가장 취약한 계층인 빈곤ㆍ독거 노인의 자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가 주도 복지 마련 급선무

전문가들은 비참한 죽음의 고리를 끊기 위해 취약계층을 위한 국가 주도의 복지 시스템 등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고령층을 위한 연금제도와 노화가 진행되며 나타날 수 있는 육체적ㆍ정신적 건강 문제를 함께 극복해줄 1차 의료 시스템 등이 잘 정비된 선진 국가일수록 노인 자살률이 낮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안 협회장은 "서구 유럽의 자살률은 고령층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데 반해 우리 사회는 나이가 들수록 자살률이 급격하게 상승한다"며 "현재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명백하며 국가 차원에서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윤 교수 역시 "노인의 현재는 결국 젊은 세대의 미래"라며 "노인들이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 긍정적인 미래상을 선사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경미기자 km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