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범죄 처벌강화 싸고 법조계 갑론을박부부강간죄 인정·친고죄 폐지 성적 자기결정권 존중 확산속허위 고소 증가 등 부작용 생겨 양형 올려도 범죄 발생 늘어 "예방·치료에 초점" 목소리

아동 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 '발자국' 회원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아동ㆍ성폭행 추방을 위한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여론에 힘입어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가 갈수록 높아져만 가는 모습에 법조계 일각에서는 책임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성범죄 판결 진보적 전환

상반기 법원은 성범죄와 관련해 기존 시각을 깨는 진보적인 판결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 가운데 백미는 지난 5월 대법원의 '부부강간죄 성립'에 관한 판결이다. 대법원은 "민법상 부부간에는 성생활을 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정상적인 부부 사이라도 한쪽이 폭력과 협박을 통해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면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때는 부부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던 1970년 판례를 43년 만에 뒤집은 셈이다.

정부도 성범죄 예방을 위한 큰 한 걸음을 내디뎠다. 6월 법무부는 성범죄와 관련된 법률들을 개정해 60년 만에 성범죄자에 대한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했다. 성범죄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거나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성범죄의 피해 대상을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해 남자 역시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했다.

이 같은 법원과 정부의 변화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환영 받고 있다.

"법 기준 앞서간다" 지적

그러나 일각에서는 "성에 대한 국민 정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데 법과 기준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너무 빠르게 확대되는 성범죄에 대한 기준과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수위는 법조계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사안이다.

하급심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입장의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는 걸그룹 멤버로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의 팔뚝 안쪽을 만진 매니저에게 성추행이 인정된다며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팔을 만진 행위는 본인 의사에 반한 것으로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만한 행동"이라고 판결했다. 부산고법 역시 지난 1월 허리 부분을 만진 등의 행동이 학생들의 복장을 단속하다 훈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벼운 접촉일 뿐이라 주장한 교사에게 "학생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으므로 추행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700만원의 벌금형을 내리기도 했다.

한 때 사귀었던 남성의 성폭행 미수로 받은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을 상해로 인정한 사례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동거하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한 충격으로 수면장애와 악몽, 대인관계 위축 등에 시달린 A씨의 피해를 인정해 신체적 상해가 없음에도 강간치상죄를 적용, 가해자에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단순강간죄는 법정형이 3년이지만 강간치상죄가 적용되면 5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변화가 가속화되며 남성들 사이에서는 '나도 언제든지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친고죄까지 폐지된 후 사이버상에는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으며 서로 민ㆍ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성관계 합의서까지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법원은 사회가 변하고 있으며 지금처럼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판결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원 입장에서도 성범죄 처벌 수위가 너무 높아진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성범죄 재판을 맡는 한 부장판사는 "현실 속의 성범죄는 나영이 사건이나 도가니 사건 같은 중대범죄보다 직장동료간의 접촉이나 과거 연인관계였던 이성간의 범죄 등이 훨씬 많다"며 "피해자의 고통은 물론 크지만 중대범죄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사안에도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무거운 것을 악용해 허위 고소가 늘어나는 것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다. 성범죄의 경우 물증 없이 가ㆍ피해자만의 진술만으로도 범죄가 성립하고 처벌이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원과 검찰은 이런 경향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무고죄가 발각된 건에 대해 엄벌을 내리고 있지만 진술만 듣고 피해자인지 무고사범인지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범죄 예방 효과 '회의적'

성범죄 처벌을 높이는 것이 범죄예방에 도움이 되냐는 점에서도 회의적이다. 대한변협은 2012인권보고서를 통해 "성범죄에서 양형을 올리고 전자발찌, 정보공개, 화학적 거세까지 도입하고 있는데 성범죄 발생 빈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며 "형벌은 범죄와 범죄자의 책임에 상응하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조계 한 관계자 역시 "성범죄 형벌이 가장 높다는 미국이야말로 성범죄가 가장 활개를 치는 국가"라며 "엄벌을 내리는 것은 손쉽지만 중대범죄가 아닌 한 반성 후 사회복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양형이 훨씬 중요하며 처벌보다 예방ㆍ교정ㆍ치료 등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경미기자 kmkim@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