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견기업 설 자리 좁아지지만 현실적 대책 미비
흔히 '산업의 허리'로 비유되는 중견기업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며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인체의 중심이 되는 허리가 얇아지다 못해 끊어질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정부의 지원은 중소기업에만 몰리고 대기업은 위에서 짓누르는 바람에 중견기업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열린 총ㆍ대선에서 저마다 '중견기업 육성'을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문제의 심각성은 대부분 인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대책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
대ㆍ중소기업 사이에서 고군분투
위평량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중견기업의 특성과 성장 및 위축에 관한 연구'보고서(이하 보고서)에서 "중견기업은 중소기업기본법상 중소기업 범위를 벗어났지만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는 소속되지 않는 기업"이라고 정의했다. 직원수, 매출 등에서 중소기업보다는 규모가 크지만 대기업에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고서는 외감법 적용 대상 기업과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분석했으며 그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의 수는 2012년 말 기준 651개(대기업 76개, 중소기업 12,064개)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견기업 당 평균 고용인원은 424.5명으로 대기업의 19.8%에 지나지 않지만 중소기업보다는 7.0배 많이 고용하고 있다. 중견기업의 평균 자산규모도 대기업의 13.31% 수준에 불과하지만 중소기업보다는 4.9배 큰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비율은 약 111%로 대기업보다는 약 1.2배(18.48%p) 높지만 중소기업의 64.8%에 불과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사다리에서 떨어질 가능성↑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당시 중견기업에 속해 있었던 426개사 중 2012년 현재까지 중견기업으로 남아있는 기업은 40.84%에(174개) 수준이었다. 반면,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비율은 12.91%(55개)에 불과했고 당시보다 규모가 축소된 비율은 46.24%(197개)에 달했다. 실제 크기만을 놓고 따지면 결코 작지 않은 기업임에도 대기업으로 성장한 비율이 의외로 낮은 반면, 절반 가까운 기업들이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산업은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과 제조업으로 각각 14.81%, 14.73%였지만 산업별로 별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중소기업으로 위축된 기업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은 부동산 및 임대업(69.09%),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66.66%), 도매 및 소매업(53.73%)로 나타났다.
대기업으로 성장한 중견기업 중 일반인들에게 특히 익숙한 기업들로는 엔씨소프트, 강원랜드, 팬택, 신도리코 등이 꼽힌다. 1997년에 설립된 엔씨소프트의 경우 불과 9년 만인 2006년에 상시직원 1,000명을 돌파하며 대기업에 올랐다. 강원랜드는 중견기업을 더욱 빨리 졸업했다. 강원랜드는 설립 4년만인 2002년, 자산 5,000원을 넘어서며(6,952억원) 대기업 대열에 합류했다.
기업의 성장과 쇠락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지만 기업성장에 있어서 총체적 경영성과가 좋은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보다 우월한 것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중견기업 중 주요 지표상으로 상위 20%에 해당하는 기업들이 하위 20% 기업들보다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비율이 2.67배나 높았다. 하위 20%기업이 중소기업으로 위축된 비율도 상위 20% 기업보다 1.23배 높았다.
그러나 주요 재무지표가 우량한 기업이라 할지라도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중소기업으로 축소된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자산규모, 매출, 부채비율 등을 따져봤을때 상위 20%의 기업이 중소기업으로 추락한 비율은 대기업으로 상승한 경우의 각각 1.62배(성장 24개, 축소 39개), 1.25배(성장24개, 축소 30개), 3.47배(성장 15개, 축소 52개)로 나타났다. 중견기업에서 난다긴다 하는 기업들도 대기업으로 상승하기보다 중소기업으로 떨어질 확률이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피터팬 증후군 생길만하네
산업의 허리인 중견기업 중 절반이 설 자리를 잃고 다시 중소기업으로 내려앉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식경제부가 담당하던 중견기업 정책 담당 업무를 이관받은 중소기업청이 지난달 발표한 '중소ㆍ중견기업 성장애로 실태조사'(이하 실태조사)에 따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중소기업에서 벗어나 중견기업이 되면 법인 취득세 등에서 혜택이 사라진다. 연구개발(R&D)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 R&D비용 세액공제율은 25%지만 중견기업은 8%에 불과하고 대상도 매출액 3,000억원 미만 회사로 국한된다. 도한 중소기업의 경우 기술 취득금액의 7%, 투자액의 3%를 세액공제하지만 중견기업이 되면 이런 혜택이 사라진다. 중견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액 비중(1.6%)이 중소기업의 절반에 부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밖에 전문인력 부족(10.5%), 자금조달 애로(10.3%), 하도급 등 규제증가(9.0%)도 중견기업을 옥죄는 항목으로 나타났다. 직원 고용시 소득세 면제 및 사회보험료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까닭에 좋은 급여를 제공할 수 있는 중소기업에 우수인력을 빼앗기는 것, 회사채를 발행할 때 높은 금리 및 수수료를 적용받는 것,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 등으로 규제를 받는 것 등이 중견기업의 살길을 막막하게 하는 것이다.
현실적 대책은 언제쯤?
박근혜정부가 중견기업 키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결심했지만 결과는 불투명하다. 중소기업청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중소기업들의 부담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중견기업법을 제정, 9월 정기국회 때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중견기업의 성장사다리를 구축하겠다 말만 많고 특별한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라며 "중소기업 정도만큼은 바라지도 않으니 대기업 틈새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게 지원해주면 바랄 게 없겠다"고 하소연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