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기업 오너 이전투구 대내외 악영향…박근혜정부 경제비전과도 어긋나

(br)금융실명제 위반 논란 될 수, 차명계좌 통한 비정상 상속도 비판 대상

(br)재판부 ‘화해’ 카드 정부와 교감 소문, 이재현 구속 ‘변수’로 이어질지 주목

“형제간 다툼이 온 국민에게 실망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화해하려는 움직임은 없나요? 재판 중이라도 화해하도록 설득해 국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어떨까요.”

지난달 27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재산을 둘러싼 삼성가(家) 형제 상속소송이 한창이던 서울고법 민사14부. 윤준 부장판사는 장남 이맹희(82)씨와 삼남 이건희(71) 삼성전자 회장 측이 항소심 첫 재판부터 날선 공방을 벌이자 화해를 권유하고 나섰다.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 말고 서로 화해로 풀라는 주문이었다.

순간 법정은 술렁였다. 이내 조용한 분위기로 바뀌었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맹희씨 측 대리인은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의 대리인은 “알아보겠다”고 답했다.

이어 양측이 몇 차례 설전을 벌였지만 담당 판사의 화해 권고 이후라 맥빠진 공방이 됐다. 재판 과정이나 종료 후 양측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맹희씨 측이 어떤 ‘기대’를 나타낸 반면, 이건희 회장 쪽은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사실 이번 항소심은 이맹희씨가 1심에서 완패한 터여서 반전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담당 판사의 화해 권고는 표면상 이맹희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데 반해 이건희 회장은 얻을 게 없는 조처였다.

차명계좌 논란 차단 조치?

그렇다면 윤준 부장판사는 왜 형제 간 상속소송을 화해로 매듭지으려 한 것일까?

윤 판사의 조언대로라면 삼성이라는 국내 대표기업의 형제가 재산 싸움을 벌이는 것이 국민에게 실망을 주기 때문에 화해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국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인데 법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이맹희씨가 “(이건희 회장의)한 푼도 안 주겠다는 탐욕이 소송을 초래했다” 고 한데 대해 이건희 회장이 “그 양반(이맹희씨)은 우리 집에서 이미 퇴출당했다” 등의 독설로 국민에게 실망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재판부가 적극적으로 간여해 화해까지 권고할 일은 아니다.

윤 판사가 삼성가 형제들의 상속소송에 화해를 권고한 것과 관련, 몇가지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선 재판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번 소송전은 삼성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하던 국세청이 지난해 6월 이맹희씨 등 형제들에게 “고 이병철 회장의 차명재산이 2008년 12월 이건희 회장 명의로 넘어갔는데, 상속인들이 지분을 포기하고 이건희 회장에게 증여한 것이 맞느냐”는 취지의 공문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이에 이맹희씨를 비롯 이병철 선대회장의 차녀 숙희씨(78ㆍ구자학 아워홈 회장 부인), 조카인 재찬 씨(전 새한미디어 사장) 부인 최선희씨 등이 강하게 반발하며 법적 조치에 들어갔다.

이들이 청구한 최종 소송가액은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에버랜드 주식 등을 포함해 총 4조849억2322만원에 달했고, 인지대만 127억원에 이르는 등 개인 재산 분할 소송으로는 사상최대 규모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지난 2월 원고 측이 이 회장을 상대로 낸 삼성생명 주식 17만 7732주에 대한 인도청구와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낸 삼성생명 주식 21만 5054주 인도청구를 각하하고 원고의 나머지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건희 회장의) 상속 재산으로 인정되는 주식에 대한 인도청구는 10년의 제척기간(권리 존속기간)이 경과돼 부적법하고, 나머지 삼성생명 주식과 이건희 회장이 수령한 이익배당금은 상속재산이 아니다”고 판시했다.

이후 이숙희씨 등은 항소하지 않았지만 이맹희씨 측은 지난 2월 청구금액(소송가액)을 대폭 줄여 96억여원을 청구하는 내용의 항소를 제기했다. 이씨 측은 항소심 과정에서 유리한 정황이 나올 경우 청구취지(소송가액)를 확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1심은 전체적으로 이건희 회장 측의 완승으로 끝났지만 재판부의 판결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이건희 회장의 상속이 ‘차명계좌를 통한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병철 창업주가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상속재산을 단독 명의로 변경한 것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이는 지난달 12일로 20년이 되는 금융실명제와도 충돌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 다른 대기업들도 국내외에 비자금이 존재하고 이를 비정상적으로 활용하는데 금융실명제가 견제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삼성가 상속소송에 대한 1심 재판이 위법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단초를 마련해준 꼴이 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더구나 박근혜정부가 지하자금 양성화를 통해 국가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 금융실명제 위반 논란은 큰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다. 때문에 법조 일각에서는 항소심 재판부가 이맹희-이건희 형제 측에 재판을 통해 판가름하기보다 화해를 권고한 이면에 ‘비정상의 정상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추론도 나온다.

차명재산 원천 파장 부를 수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1989년 이건희 회장이 공동 상속인과의 상속분할협의에 의해 삼성생명ㆍ삼성전자 차명주식을 단독 상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단서를 달았다. 따라서 1987년 상속 개시 당시의 차명주식과 이건희 회장 또는 삼성에버랜드가 현재 보유한 청구 대상 주식이 동일한 것인지, 상속인으로서 이맹희씨의 권리 행사기간(제척기간)이 법적으로 여전히 인정할 수 있는지 등이 논란이 될 수 있다.

항소심에서 삼성가의 숨겨진 자산, 또는 삼성가 차명재산의 원천이 드러날 지도 관심사다. 검찰은 2007년~2008년 삼성과 CJ를 상대로 삼성가 차명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지만 자금의 원천에 대해서는 끝내 결론을 맺지 못했다.

앞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 특검 당시 차명재산 4조 5000억여원이 발견돼 세금 6400억여원을 낸 바 있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3남 5녀 중 막내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 역시 지난 2006년 차명재산이 드러난 뒤 세금을 냈다.

최근 CJ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중인 검찰은 2008년 상속 재산을 차명으로 숨겨 관리해오다 발각돼 관련 세금을 내는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차명재산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CJ측은 문제의 차명재산이 비자금이 아니라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자금이라고 주장해 왔다. CJ비자금의 원천을 추적하다 보면 삼성가의 또 다른 자산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상속재산을 두고 다투고 있는 이맹희-이건희 형제의 항소심 소송도 크게 확장될 수 있다.

재판부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이번 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수사 과정에 다른 증거(비자금 원천, 삼성가 또 다른 자산)가 나오면 항소심은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을 수 있다. 재판부 입장에선 소송 양측이 화해를 통해 사건을 조기에 마무리 하는 게 최선책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재현 회장 구속 변수 되나

이맹희씨의 아들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구속도 삼성가 상속소송의 변수가 될 수 있다.

이재현 회장은 지난 7월 수천억원대의 배임ㆍ탈세ㆍ횡령 등 혐의로 구속됐다가 신장이식 수술로 구속집행정지 허가를 받은 상태다.

앞서 이재현 회장 비자금 수사가 이병철 선대회장의 차명재산과 맞닿아 있는 게 밝혀질 경우 사정은 복잡해진다. 자칫 이건희 회장이 단독상속한 재산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게다가 이 회장의 구속과 관련, 이맹희-이건희 형제 간의 구원(仇怨)에다 CJ그룹과 삼성의 악연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따라서 삼성가 일원인 이 회장이 구속된 마당에 두 형제의 상속소송이 지속되는 것은 당사자들이나 양측 그룹, 그리고 국민 여론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재계 안팎의 시각이다.

기업 오너를 지낸 한 원로는 “재판 과정이야 어떻게 비롯됐든 돈 문제로 국내 대표 기업의 형제가 다투는 것은 볼썽사납다”면서 “어느 한쪽이 양보해 소송을 멈추는 게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경제평론가는 “소송의 시시비비를 떠나 국민은 국가를 대표하는 기업, 가장 돈 많은 사람들이 상속소송으로 이전투구 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있다”면서 “재판부 권고대로 화해를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맹희-이건희 형제 양측은 화해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지 않지만 일단 항소심에 전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재판이 끝난 뒤 이맹희씨 측은 “상속인으로서 고유 권리를 되찾는 일인 동시에 선대회장의 진정한 유지가 무엇인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과정인 만큼 (항소심을)끝까지 갈 것”이라면서도 “(이건희 회장 측에서)화해 시도가 있다면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화해 여부에 대해 아직 노코멘트 입장이다. 사실 1심에서 완승한 상황에서 굳이 ‘화해’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1심 판결이 말해주듯 진실이 밝혀졌는데 상대 쪽에서 다른 목적을 갖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면서 “하지만 소송을 계속 하는 데 따른 여론이 부담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경제계의 한 원로는 “이재현 회장이 구속된데다 부인으로부터 신장 이식 수술을 받는 게 딱해 보였는 데 여론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면서 “이제는 형제들이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재판부가 느닷없이 ‘화해’를 권고한 것을 두고 정부 측과 사전 물밑 조율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박근혜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행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이례적 주문이었다는 분석이다.

항소심 재판 다음날 박근혜 대통령과 10대 그룹 총수는 청와대에서 오찬을 갖고 경제와 관련한 여러 얘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를 위한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주문했고, 이건희 회장은 현 정부의 창조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투자ㆍ고용 계획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에 움츠린 기업들을 격려하며 경제활성화를 독려하는 상황에서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이 상속소송으로 지리하게 다투는 모습은 정부나 국민에게 실망스럽게 비친다”면서 “재판부가 화해를 권고한 것은 그런 정재계의 분위기와 여론을 반영한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삼성가 상속소송의 다음 재판은 10월 1일 열린다. 그때까지 양측 간에 화해 움직임이 가시화 될지 많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윤지환기자 jj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