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는 파리목숨? 우리는 다르다2인자 올라선 이인원… 한국의 최고경영자 차석용24년째 CEO 이채욱… 부도회사 살려낸 고영립신세계 핵심 구학서

'옷은 새것이 좋고 사람은 옛사람이 좋다'는 말이 재계에서는 그다지 통용되지 않는 듯하다. 오너일가가 아닌 전문경영인의 경우 자신이 맡고 있는 회사가 실적을 내지 못하면 그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까닭이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오늘날 기업환경에서 항상 좋은 성적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전문경영인들은 말 그대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목숨'이 돼버렸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 마찬가지로 재계에도 오랫동안 임기를 보전해온 장수CEO들이 버젓이 존재한다. 재직하는 기간 내내 해당 기업의 호실적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거나 오너의 신뢰가 깊어 CEO로서 오랫동안 그 맹위를 떨치는 사람들이다. 경영능력이 출중한 이들의 경우 여러 기업을 전전하며 CEO를 맡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에 <주간한국>에서는 10년 이상 재직해 이른바 '직업이 CEO'로 불리는 장수CEO들의 성공 비결을 조명해봤다.

장수CEO 찾기 어려운 10대 그룹

재계를 떠받치고 있는 10대 그룹 내에는 유독 장수 CEO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정도 연한이 차면 젊은 사람들을 위해 그룹 고문으로 물러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CEO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경우 그룹 내 위치가 강고해져 나중에는 오너마저 다루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까닭에 그 전에 정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0대 그룹 장수 CEO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이인원 롯데쇼핑 부회장이다. 대표적인 '신동빈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 부회장은 16년간 CEO를 맡아온 까닭에 재계를 통틀어서도 최장수CEO 대열에 올라있다. 1973년 호텔롯데에 입사하고 1987년 롯데쇼핑으로 자리를 옮긴 이 부회장은 관리담당, 상품매입본부, 영업본부 등을 두루 거치다 1997년 마침내 롯데쇼핑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등극한다. 이후 그룹의 핵심인 유통사업을 진두지휘하며 롯데그룹을 국내 제일의 유통기업으로 도약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이 부회장은 2007년 롯데그룹 정책본부 부본부장을 거쳐 2011년부터 본부장을 맡으며 신동빈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좌, 그룹의 핵심사업을 관장해왔다. 정책본부 본부장에 역임될 당시 전문경영인으로서는 롯데그룹 최초로 부회장 직함을 달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롯데그룹의 2인자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중이다.

최치훈 삼성카드 사장이 삼성그룹에 몸담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7년 삼성전자 고문으로 위촉됐으니 삼성그룹에는 6년 정도밖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 미국 GE(제너럴일렉트릭) 항공기엔진 아시아 사장에 올랐던 것을 감안하면 CEO 18년차임에는 분명하다.

GE 에너지 아시아태평양 총괄사장 시절 삼성그룹과 인연이 닿은 최 사장은 삼성전자에서 고문, 프린팅사업부문 사장을 맡으며 삼성전자의 프린터 사업부를 레이저복합기 분야의 세계 1위로 올려놨다. 2009년 삼성SDI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은 이후에는 에너지전문기업을 선언, 기업 체질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2010년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으로 금융권에 입성한 최 사장은 '숫자카드'를 히트시키고 신사업을 발굴하는 등 역대 최고 실적을 연일 갱신하고 있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애널리스트들이 꼽는 한국의 최고경영자로 유명하다. 1985년 미국 P&G 본사에 입사해 두각을 나타내던 차 부회장은 1998년 P&G 쌍용제지 대표이사 사장으로 CEO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P&G 한국총괄사장을 거쳐 2001년부터는 해태제과 대표이사 사장도 지낸 바 있다.

차 부회장이 LG생활건강 대표이사 사장으로 영전한 것은 2005년이었다. 코카콜라음료, 더페이스샵, 해태음료, 보브 등을 차례로 인수ㆍ합병한 차 부회장의 결단으로 LG생활건강은 생활용품, 화장품, 음료라는 사업의 삼각축을 굳게 세울 수 있었다. 그 결과 LG생활건강의 전년동기대비 매출과 영업이익은 차 부회장이 이끌기 시작한 2005년 이후 각각 31분기, 34분기 연속 증가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차 부회장은 2011년 LG그룹 사상 외부출신 인사로는 처음으로 부회장에 등극하기도 했다.

서경석 (주)GS 부회장은 관료출신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장수CEO이다. 재무부 세제국 사무관, 주일본대사관 재무관 등 2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1991년 LG그룹으로 영입된 서 부회장은 1996년 LG투자신탁운용 대표이사 사장으로 CEO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후 1998년 LG종합금융 대표이사 사장, 2000년 극동도시가스 대표이사 사장, 2001년 LG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등을 거친 서 부회장은 2009년부터 (주)GS의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IMF 외환위기 직후 어려웠던 LG종합금융의 회생, 합병 후 LG투자증권의 경영정상화 등 어려운 회사를 맡아 반드시 살려내는 '턴어라운드' 전문가로 알려진 서 부회장은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 아래 그룹 경영 전반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여러 내 직업은 CEO"

10대 그룹 밖에도 장수 CEO는 상당수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이채욱 CJ대한통운 부회장은 CEO 경력만 24년에 달해 '직업이 CEO'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1972년 삼성그룹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해외사업부 본부장을 지내던 1985년 삼성그룹과 GE의 합작 투자사인 조인트벤처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위촉, CEO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GE 메디컬 사업부문을 담당하다가 GE 코리아 회장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간 이 부회장은 2008년 9월 공모를 통해 인천국제공항 사장을 맡아 인천공항을 세계적인 공항으로 키우는 등 난다 긴다 하는 CEO 중에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올해 3월부터는 새로 출범한 CJ대한통운의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이창근 매일유업 사장은 올해로 16년차 되는 장수CEO이다. 대우에서 영업, 기획, 해외사업 등을 두루 거치며 경영능력을 키워온 이 사장은 1997년 풀무원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옮기면서 유통업계와 인연을 맺었다. 2001년부터 풀무원의 식자재 유통 계열사인 푸드머스 대표이사를 지내던 이 사장은 2006년 CJ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CJ푸드시스템과 CJ프레시웨이 대표이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식품 및 식자재 유통 전문가로 인정받은 이 사장은 2012년 휘청이던 매일유업의 구원투수로 영입됐다. 이 사장이 대표이사를 맡은 이후 공교롭게 최대 경쟁자인 남양유업이 불공정한 갑을관계로 불매운동 직격탄을 맞는 등 흔들리게 됐고 매일유업은 그 틈을 타 16년 만에 업계 1위로 도약하는 쾌거를 이뤘다.

일반적으로 어떤 기업이건 그룹 회장직은 오너가 맡게 마련이다. 아무리 능력있고 신뢰받는 전문경영인일지라도 그에게 그룹 회장직을 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고영립 화승그룹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고 회장은 오너인 현승훈 회장과 함께 그룹의 양대 회장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그 사연을 들어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얘기가 절로 나온다.

공채 1기로 화승그룹에 몸담은 고 회장은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며 고속승진을 거듭, 37세 때 이사 자리에 올랐다. 1995년에는 적자에 허덕이던 화승T&C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 탄탄한 기업으로 되살려놓기까지 했다. IMF외환위기 때 부도를 맞은 화승그룹의 구원투수로 고 회장이 떠오른 것도 이러한 전적 때문이다.

1998년 유일하게 부도를 맞지 않은 계열사 두 곳((주)화승, 화승상사)의 대표이사를 맡은 고 회장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 그룹 내 금융, 레저, 제지 등 비주류 업종을 정리하고 자동차 부품, 스포츠 패션 브랜드, 정밀화학의 3대 핵심 과제에 집중했다. 고 회장의 인도 아래 화승그룹은 결국 되살아났고 부도 당시 8,400억원에 불과했던 그룹 매출도 지난해 2조7,000억원으로 3배 넘게 늘어났다.

한 우물에 올인해 승승장구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기업을 두루 거치며 CEO 생활을 한 장수CEO가 있는 반면, 오로지 한 기업의 CEO만 십수년 재직한 사람도 있다.

최양하 한샘 회장은 대우중공업을 다니다 1979년 한샘의 경력사원으로 입사했다. 판촉과장, 생산공장장, 영업담당 상무를 거친 최 회장은 1994년 대표이사 전무에 오른 뒤 지금까지 한샘을 진두지휘하며 오너인 조창걸 회장을 보좌해오고 있다.

최 회장은 소규모 부엌가구업체였던 한샘을 국내 최고 가구업체로 키워냈다. 1986년 부엌가구 부문 업계 1위 달성의 일등공신인 최 회장은 1997년 시장에 뛰어든 종합인테리어 부문 역시 5년 만에 1위 자리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국내 최초로 홈인테리어 패키지 개념을 제시, 종합인테리어 유통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해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저축은행 사태가 발발한 2011년 이후 16개 저축은행이 줄도산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우량은행으로 건재함을 과시하는 곳이 있다. 바로 동부저축은행이다. 금융업계의 대표적인 장수CEO로 꼽히는 김하중 동부저축은행 부회장의 리더십이 동부저축은행을 '믿을만한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967년 한일은행에 입사하며 금융권에 첫발을 내디딘 김 부회장은 1990년 동부증권 상무로 영입됐고, 1995년부터 동부저축은행에 몸담고 있다 1997년 마침내 대표이사 부사장에 취임했다. 동부저축은행을 업계 최고의 자산건전성과 재무안정성을 보유한 우량저축은행으로 성장시킨 김 부회장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구학서 신세계 회장은 엄밀히 말해 현재 대표이사가 아니다. 2009년말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대표이사 자리를 오너일가인 정용진 부회장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정 부회장을 보필하는 역할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신세계에 미치는 구 회장의 영향력을 볼 때 여전히 CEO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1972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구 회장은 제일모직, 삼성물산 등 삼성그룹 계열사를 전전하다 1996년 신세계로 몸을 옮겼다. 경영지원실에서 역량을 인정받은 구 회장은 1999년 대표이사 부사장에 올랐고 취임 초기부터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작하며 신세계의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효율경영의 차원에서 종합금융 등 비유통 기업들을 과감히 쳐내고 그래픽, 디스플레이 관련부서도 분사를 통해 정리하는 등 명실상부한 유통기업으로 체질개선에 나선 것이다.

주력인 유통업도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갔다. 백화점 PB사업을 청산하고 고급화 전략을 채택한 반면, 이마트에서는 오히려 PB사업을 대폭 강화하는 차별화 전략을 꾀한 것이다. 프라이스클럽을 과감히 매각해 그 자금으로 이마트 부지를 선점하고 신세계건설을 설립해 이마트 점포 표준화 전략을 세운 것도 호평을 받았다. 대형마트 100호점 최초 돌파, 세계 최대의 백화점인 부산 센텀시티점 설립 등도 구 회장이 일궈낸 대표적인 성과다.

<관련기사> 장수CEO의 산실, GE

장수기업은 장수CEO를 키운다? 이 말에 가장 적합한 기업이 있다. 바로 1870년대부터 존재해온 GE(제너럴일렉트릭)이다.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잡아온 GE의 생존비법 중 하나는 장수CEO로 자랄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다.

GE는 인재발굴과 양성을 위해 'session C'라는 인사평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45세에 최연소 CEO에 올라 20여 년간 GE를 이끈 잭 웰치 전 회장이나 2001년에 취임, 13년째 CEO를 맡고 있는 제프리 이멜트 회장도 해당 시스템의 덕을 봤다고 전해진다. GE CEO의 평균 재임 연수는 약 9년이고 잭 웰치 전 회장 이외에 20년 이상 CEO 자리를 지킨 사람이 세 명이나 되는 것도 해당 시스템의 위상을 방증한다. 최치훈 삼성카드 사장, 이채욱 CJ대한통운 부회장 등 국내 유명 장수CEO들도 GE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김현준기자 realpae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