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조선소 지어 바친 꼴"

강덕수 STX 회장이 지난해 7월 중국 STX다롄 조선해양생산기지에서 열린 초대형광물운반선 '발레에스피리토산토' 호명명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의 항구 도시 다롄의 작은 섬 마을인 창싱다오(長興島)는 STX다롄의 도시나 다름없다. 현재 중국 공산당 서열 2위인 리커창 부총리는 지난 2005년 랴오닝성 총서기로 재직할 당시 조선업을 전략적 지원업종으로 정하고 황무지였던 이곳에 STX그룹의 투자를 유치했다. 2008년 말 STX다롄 조선소가 완공된 후 인구 5만명의 작은 어촌이었던 창싱다오는 STX 진출과 함께 협력업체와 주거단지가 들어서며 15만명의 산업도시로 바뀌었다.

중국정부-채원단 줄다리기

STX다롄에서 고용한 현지 인력만 2만6,000명에 이르고 STX와 함께 중국에 진출한 국내 협력업체(2∙3차 협력사 포함)도 400여개에 달한다. 다롄에 있는 한국 교민 2만여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STX다롄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한중 산업 혈맹'의 상징과도 같은 STX다롄이 강덕수 STX 회장의 침몰과 함께 비극의 운명을 맞이할 처지에 놓였다. STX그룹 구조조정의 마지막 퍼즐인 STX다롄의 처리 문제를 놓고 중국 정부와 우리 채권단 간 운명을 건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강 회장의 사퇴를 이끌어낸 채권단은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해 다롄 문제 처리에 나선 상황. 채권단은 자율협약을 맺은 STX 계열사 위주로 구조조정을 진행한다는 방침 아래 STX다롄에 대해서는 청산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TX조선∙중공업∙엔진 등 국내 계열사 정상화를 위해서만 3조5,000억원 이상의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퍼부은 돈을 모두 떼이고 중국에 '조선소 하나를 바쳤다'는 비판을 듣더라도 이 참에 털고 나가겠다는 얘기다.

반면 다롄시 정부와 중국계 은행은 STX다롄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정상화 작업을 진행하되 어떻게든 우리 채권단의 지원을 이끌어낼 방침이다.

"다롄의 문제 급부상 할 것"

지난 10일 금융계에 따르면 ㈜STX와 산업은행 등으로 구성된 우리 대표단과 중국 다롄시 정부, 공상은행 등 중국계 은행으로 구성된 중국 대표단이 이르면 이달 서울에서 STX다롄 처리 문제를 위한 협상을 벌인다. 채권단의 한 고위관계자는 "강 회장의 사퇴로 그룹 구조조정의 1라운드가 끝난 만큼 잠복해 있던 STX다롄 문제가 급부상할 것"이라면서 "STX다롄에서 발을 빼려는 우리 채권단과 막으려는 중국 측 간에 치열한 싸움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진해와 부산 외에 국내에 신규 조선소 부지 물색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다롄을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핵심축으로 삼았다. 중국에서 사업을 할 경우 외국 자본은 49% 지분만 보유 가능했지만 당시 STX는 100% 자기자본으로 STX다롄을 설립했다. 상하이와 광둥성처럼 랴오닝성 연해지역을 중국의 신규 성장축으로 개발하려 한 중국 측의 파격적인 배려 덕택이었다.

강 회장은 이 곳에 2008년까지 총 28억달러(약 3조원)을 쏟아 부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STX의 다롄 투자는 공산당 내에서 자신의 역량을 보여줘야 했던 리커창 부총리의 외자유치에 대한 절박성과, 고속성장을 발판으로 해외에 진출하려는 STX그룹의 욕구가 맞아 떨어져 이뤄진 것"이라면서 "현재는 다롄이 STX 부실의 원흉으로 전락했지만 당시엔 우리 기업의 대표적인 해외진출 모델로 소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9년 글로벌 위기 이후 조선업황이 악화되면서 모회사인 STX조선과 함께 다롄의 수익성은 크게 악화됐다. 한 때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의 핵심축이었던 다롄이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기까지 4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STX다롄이 무너지면 칭싱다오 지역경제는 물론 다롄 한인사회도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이미 1차 한국 협력업체들은 지난 3월말 조선소가 중단된 이후 우리 돈으로 1,000억원이 넘는 납품대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근로자들에게 밀린 임금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부도상태다.

채권단도 마땅한 수 없어

채권단은 이 같은 상황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수도 없다. 이미 STX조선과 STX중공업, STX엔진 등 자율협약을 맺은 국내 계열사를 살리는데만 3조원이 넘는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STX조선을 비롯한 계열사들은 STX다롄이 중국과 한국계 은행에서 빌린 돈 1조800억원에 대해 지급보증을 서고 있다. 채권단은 STX계열사들이 돈을 갚지 못해 최악의 경우 지급보증이 실현되더라도 이를 털고 가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미 채권단은 지난 7월 STX조선 실사결과에서 1조800억원 중 일부 금액을 손실로 잡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실제 지급보증이 실현될 경우 채권단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당초 STX조선 실사에서 다롄을 떼어내기로 한 것은 중국 측이 지급보증을 청구하지 않고 다롄을 인수할 때의 얘기"라면서 "실제 지급보증이 발생한다면 다롄 처리 문제는 복잡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측은 국내 채권단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STX 다롄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국내은행의 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급보증 해소를 요구하는 우리 채권단과 달리 STX다롄 정상화를 위해 한국은행들도 고통 분담에 나서라는 것이다.

STX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STX그룹이 투자한 3조원 가운데 절반은 국내 자본으로 현 상태에서다롄을 중국측에 그대로 넘겨주면 국부 유출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결국 채권단의 계획대로 가겠지만 STX다롄 정상화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민우기자 ingagh@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