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물론 자신도 "사는 게 지옥"가정폭력 원인 20%는 '부부불신' 의심에서 시작돼 편집증으로 악화아내 속옷 몰래 검사 의뢰하기까지 불안장애 동반해 일상생활도 어려워증상 심하면 살인사건 치닫기도 전문의마저 "다루기 어려운 질병"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집요하게 의심하는 의처증 증상이 심해지면 아내를 폭행하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 이혜영 기자
A씨는 어느 날 차를 끌고 나갔다가 돌아온 아내 B씨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는 자동차 실내 조명등과 조수석 의자의 각도가 자신이 설정해둔 것과 다르다며 딴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냐고 큰소리쳤다. B씨가 강하게 부인했지만 A씨의 의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A씨는 아내에게 이메일과 휴대폰 통화내역을 내놓으라고 했다. 한 번 시작한 A씨의 의심은 그 정도를 더해갔다. 급기야 A씨는 세탁기에 든 B씨 속옷을 꺼내 모 업체에 정액 검출 여부를 의뢰했다. 정액 양성반응 결과가 나오자 A씨는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증거로는 아내의 속옷을 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속옷에서 나온 정액은 A씨의 것이었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증세인 의처증. 흔히들 일시적인 감정문제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처증은 엄연히 병이다. 의처증은 의학적으로 '질투망상'이나 '부정망상'이라고 부른다. 왜 병일까? 오로지 아내를 상대로만 발생하는 데다 의처증이 있으면 배우자가 결백하단 증거가 있어도 절대 안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A씨는 아내의 속옷에 묻은 정액이 자신의 것이라는 검사결과가 나왔는데도 아내를 상대로 소송을 이어갔다. 법원은 20년 이상 함께 살아온 아내를 아무 근거 없이 의심하고 추궁하는 것도 부족해 간통죄로 형사고소까지 해 부부간의 애정과 신뢰를 깨뜨렸다며 A씨에게 4,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망상에 가까운 편집증

의처증은 편집증이다. 편집증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 대상에 집요하게 의심하고 매달리는 걸 말한다. 일단 의처증에 걸리면 일반인은 그냥 넘어갈 문제로 끙끙 앓다가 아내를 집요하게 괴롭히기에 이른다.

C씨는 어느 날 아내가 직장에 다시 나가기 시작하더니 회식을 핑계로 늦게 귀가하는 사례가 많아졌는데 요즘에는 성관계까지 거부한다는 내용의 고민 글을 익명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C씨는 아내가 누구와 어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지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몰래 엿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귀가한 아내가 샤워부터 하면 다른 남자와 만나고 온 흔적을 지우려고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고 했다. 요즘에는 아내가 화장을 조금만 진하게 해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면서 아내를 위치추적이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고 말했다.

의처증 남편을 둔 아내는 흔히들 '사는 게 지옥'이라고 말한다. 남녀 관계에서 적당한 구속은 사랑의 징표라고 하지만 의처증은 일반적인 구속과는 차원이 다른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기에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올 초 한 방송에 의처증 남편 때문에 고민인 여성이 출연했다. 이 여성의 남편은 아내와 인사를 했다는 이유로 아내 직장동료를 폭행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아내의 속옷을 검사하는 건 기본이었다.

한국가정법률소가 지난해 서울가정법원, 서울서부지방검찰청,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원보호관찰소로부터 상담을 위탁받은 가정폭력행위자 44명 중 40명(90.9%)은 남성, 4명(9.1%)은 여성이다. 남편의 아내 폭력이 36명(81.8%)으로 가정폭력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폭력 행사 원인(중복응답 가능)은 다양했다. 가부장적 사고 등 성격차이가 40건(48.8%)으로 가장 많았고 부부간 불신(16건, 19.5%), 음주(12건, 14.6%)가 뒤를 이었다.

'부부 불신'이 화(禍) 불러

눈에 띄는 건 '부부간 불신' 항목이다. 한국가정법률사무소는 "부부간 불신의 경우 2005년 이후 그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며 "남편의 외도 경험이 아내로 하여금 남편을 불신하게 만들어 부부갈등이 증폭되면서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 경우가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활동이 확대되면서 남편이 아내를 불신하게 되고 폭력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고 분석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면서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 1일 충남 천안의 한 다세대 주택 승강기 안에서 40대 부부가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됐다. 아내 이모(41)씨는 현장에서 숨졌고, 남편 유모(43)씨는 생명이 위독해 즉시 병원으로 이송됐다. 승강기 안은 선혈이 낭자했다. 두 사람이 거칠게 몸싸움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유씨는 평소 아내의 휴대전화 메신저에 다른 남자로부터 게임 관련 문자메시지가 많이 오자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유씨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두 사람은 1년간 별거하면서 불신이 더 깊어졌고 급기야 끔직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은숙 연심리클리닉 원장은 의처증 환자의 편집증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그는 "의처증 환자는 열 가지 의심 근거 중 하나라도 의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하나의 생각에 매몰돼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며 "비뚤어진 사고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귀를 닫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의처증 환자는 일상생활에서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공원에 남녀가 다정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면 대개 '연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처증 환자는 '불륜'이라고 단정한 후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상상을 자신의 상황과 엮어 또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게 반복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의처증이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라고 했다. 환자 대부분이 치료를 거부하는 데다 치료를 받더라도 평생 증상이 지속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의처증 환자는 열등감과 불안장애를 동반한다. 사람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분노 조절이 되지 않는다. 대개 우울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심을 찾아주기 위한 약물치료와 함께 상담치료를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망상장애는 사고의 패턴이나 틀을 깨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