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돈을 내 돈처럼 '펑펑'

서울 중구에 자리한 삼성생명 본사(좌)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교보생명 본사 전경. 주간한국 자료사진
금융당국이 지난 20일 '보험왕'에 대한 보험업계의 자체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최근 벌어진 보험왕 리베이트 사건에서 촉발된 조치다. 금융당국은 이참에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겠다며 단단히 벼르는 모양새다.

보험왕은 그간 숱한 물의를 빚어왔다. 고액의 보험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건 이미 관행. 고객의 돈을 횡령하는 일도 빈번했다. 최근엔 고객의 자금세탁을 거들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일탈'하게 만드는 걸까.

삼성ㆍ교보 보험왕 물의

보험왕은 보험사들이 매년 최고 실적을 올린 설계사에 붙여주는 타이틀이다. 설계사로선 최고의 자리다. 일단 보험왕이 되면 해당 보험사에서 사무실과 최고급 자동차, 기사 등이 제공된다. 각종 혜택가 배려가 최대 50여가지에 이른다.

한 해 수입은 10억원을 웃돈다. 각종 매체와 강연에 초청을 받아 유명세를 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책까지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래서 보험왕은 업계서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으로 불린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험왕들은 또다른 얼굴이 있다. 보험왕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거나 지위를 이용해 고객 돈을 내 돈처럼 주무르기도 한다. 잊을만하면 보험왕의 비리 사건이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이유다.

이번엔 삼성생명과 교보생명 보험왕이 일을 벌였다. 이들의 비리 사실은 한 인쇄업체 대표 A씨가 무자료 거래를 통해 수백억원대의 불법자금을 조성하고 일부를 해외로 빼돌린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보험왕은 A씨의 자금세탁을 도왔다. A씨는 비자금을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의 각종 비과세 보험상품 약 600여개에 분산, 은닉했다. 그가 한해 납입한 보험료만 적게는 10억원에서 많게는 40억원 규모에 달했다.

삼성생명 보험왕 B씨는 2001년부터 A씨의 보험 150여개 보험을 독점적으로 관리했다. 그 규모만 200억원에 달했다. B씨가 2010년 '전국 보험왕'에 오를 수 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보생 C씨도 1985년부터 A씨의 보험을 관리해 보험왕에 올랐다.

B씨와 C씨는 A씨의 비자금으로 수백여개의 비과세 보험상품에 가입하고 만기가 도래하면 다른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식으로 자금을 관리했다. 비과세 보험상품은 세무당국에 통보가 되지 않아 대규모 불법자금의 세탁경로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들은 보험 가입 대가로 A씨의 부인에게 수억대의 리베이트를 건네기도 했다. B씨와 C씨는 각각 3억5,000만원과 2억2,5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전달했다. 특히 B씨는 A씨의 해약보험금 60억원을 개인용도로 사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끊이지 않는 보험왕 비리

경찰 발표 이후 금융감독원이 본격 점검에 나섰다.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의 내부통제시스템을 집중 점검, 보험왕의 리베이트 정황을 적발하고 삼성생명 등에 경영 유의 조처를 내렸다. 이어 지난 20일엔 보험왕에 대한 보험업계의 자체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금감원이 이런 조치를 내린 건 그동안 보험왕이 물의를 빚은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당장 지난 10일에는 청주에서 보험왕 출신 설계사가 고이자를 미끼로 투자를 권유해 수십명으로부터 35억원을 모집해 잠적하는 일이 벌어졌다. 금감원은 사실 관계 확인에 나선 상태다.

앞서 2011년엔 알리안츠생명 보험왕이 고수익을 미끼로 60억원 상당의 투자금을 모집한 뒤 잠적하는 일도 있었다. 그는 투자받은 돈을 이익금조로 나눠주며 고객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다 돌연 종적을 감추면서 고객 60여명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됐다.

동양생명에서도 2009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출시되지 않은 상품을 고객들에게 권유해 가짜 서류에 서명을 받아낸 뒤 고객들의 돈은 15년짜리 장기 보험 여러 개에 나눠 투입했다. 하지만 '돌려막기'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사기 행각이 들통났다.

같은해 LIG손해보험의 보험왕 출신도 사고를 쳤다. 고객 동의서를 위조해 명의를 변경한 다음 보험을 해약하고 보험금을 빼내다 덜미를 잡혔다. 뿐만 아니라 투자금 명목으로 고객에게 돈을 빌리는가하면 고객 이름으로 대출받는 등의 방식으로 총 24억원을 횡령했다.

보험왕 비리 원인은?

그렇다면 이처럼 보험왕들의 각종 비리 행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업계에선 '보험왕 선발 제도'가 과열 경쟁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계속 우수한 실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불법과 편법에 손을 대게 된다는 설명이다.

보험사가 설계사들의 불법 영업 관행을 알고도 눈감아주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거액의 보험을 유치를 위해 리베이트를 제공하는 건 이미 관행이다. 그러나 보험사는 이를 제지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설계사들의 실적이 고스란히 회사의 수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보험왕 자리를 위한 치열한 경쟁과 회사의 방목이 연이은 보험왕 비리의 주된 원인"라며 "제도의 폐지나 수정이 사실상 요원한 만큼 설계사들을 대상으로 한 윤리 교육과 회사도 내부통제시스템을 강화하는 등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