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좇는 하이에나… '기업형 조폭'이 타깃'주먹 쥔 조폭' 지고 머리 쓰는 조폭이 '대세'121조 규모 지하경제 주도 '검은 돈' 온상범죄 수법 첨단화… 朴 대선공약 성과에 관심

영화 ‘범죄와의 전쟁’
검찰이 24년 만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경찰도 함께 나서면서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소탕작전'이 예고됐다. 대한민국 폭력조직계 3대 패밀리인 '범서방파','양은이파','OB파'의 활동이 뜸한 대신, 소규모로 세를 떨치는 기업형 조폭이 활개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활동 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뒷골목에서 상인들의 돈을 빼앗는 코 묻은 돈에는 관심이 없다. 잘나가는 사업가로 위장해 탈세, 횡령·배임, 기업탈취는 물론 첨단 금융범죄까지 저지른다. 야쿠자나 마피아처럼 국제적인 범죄 조직이 되는 것을 꿈꾸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은 돈을 좇는 하이에나 '기업형 조폭'의 세계를 들여다 보았다.

전통적 폭력조직계 '3대 패밀리'의 몰락

지난해 10월, 전국 폭력조직의 지각변동을 부른 사건이 있었다. 부산지역 최대 조폭인'칠성파' 2대 두목 한모(46)씨가 검찰에 구속됐다. 본래 칠성파를 이끈 두목은 이강환(72)씨지만, 고령을 이유로 2011년 1월 부산 해운대의 한 호텔에서 한씨에게 권력을 물려줬다. '회장님'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한씨는 공격적인 방법으로 상대 세력을 견제하며 조직을 이끌었다. 칠성파와 더불어 부산지역을 양분하고 있는 '신20세기파' 조직원을 찾아다니며 '작업'을 하는 등 위세를 과시했다.

조직 세력 확장에도 적극적이었다. 칠성파를 프랜차이즈화하며 세를 넓혔다. 부산 각 지역의 명칭을 따서 '온천장 칠성', '서동 칠성', '기장 칠성' 등의 이름을 붙여 세 결집을 도모했다. 광주의 폭력조직인 국제PJ파와 연합하면서 전국구 조직도 꿈꿨다. 그러나 한씨가 '회장님' 호칭을 얻은 지 불과 2년 만에 구속되면서 칠성파는 물론 폭력조직계 전체가 술렁였다. 전통적인 조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영화 ‘신세계’
칠성파의 몰락은 폭력조직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칠성파는 두목을 중심으로 뭉친 중앙권력집중 운영 방식의 2세대 '패밀리 조폭'이다. 1세대 주먹인 김두환, 이정재 등이 의리를 앞세워 정치권에 진출하거나 결탁했다면, 2세대는 '가족의 의리'를 명분 삼아 철저히 조직의 실리를 내세웠다. 조직을 공격하는 다른 폭력조직은 반드시 응징하고, 배신하는 조직원은 잔혹하게 보복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현재 칠성파는 주요 조직원 검거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검찰 관계자는 "부산 양대 폭력조직이 와해 전단계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부두목이나 간부급 조직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할 수 있어서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 운영 등 이권 다툼 '기업형 조폭' 활개

영화 '신세계'는 기업형 조폭의 세계를 그렸다. 번듯한 중견기업의 모습을 갖춘 폭력조직 '골드문'의 기업 운영권을 둘러싼 이권 다툼을 다룬다. 조직원들은 말끔한 정장을 갖춰 입고 등장하는 것은 물론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사업 지식을 갖추고 변호사를 대동하는 등 '사업가'로 위장한다. 그러나 이권을 쟁탈하기 위해선 잔인한 칼부림은 물론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문제는 영화 속 지능화된 조폭의 모습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현재 서울 시내에서 폭력조직이 할 수 있는 사업은 무엇이 있을까. 과거에는 나이트클럽이나 유흥업소 운영, 건설 관련 이권 개입 등이 대표적인 '조폭의 직업'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만큼 폭력조직이 관여하고 있는 일도 다양해졌다. 특히 평범한 시민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경제 활동 분야에도 진출해 있다.

요즘은 힘을 앞세운 눈에 띄는 '폭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금력을 이용해 주식시장에서 시세를 조종하며 선량한 개미투자자들을 상대로 주가 조작에 나서거나,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출연이나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등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휘두른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재계인과의 인맥을 앞세워 강남의 유명 고깃집을 운영하며 주변 상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기업형 조폭은 합법적인 사업가로 행세하다 보니 평소엔 느슨하게 조직을 운영한다. 과거처럼 합숙생활을 하거나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경찰 관계자는 "금목걸이 차고 온 몸에 문신을 새긴 조폭을 상상하면 큰 오산"이라면서 "명품 정장을 입고 고급 외제차를 탄 말쑥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겉으로 보기엔 일반 기업인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처럼 과격한 행동강령도 보기 힘들다"면서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조직끼리 칼부림하는 것도 싫어하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행사'가 있을 때 세를 과시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검은 돈' 주무르는 지하경제는 '조폭 놀이터'

앞에서 점잖을 빼는 조폭들은 뒤에선 '검은 돈'을 주무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90조원 규모인 국내 지하경제 가운데 121조원을 폭력조직이 주도하고 있다. 95조원에 이르는 불법사행산업 시장을 비롯해 사금융, 주식시장교란, 가짜 석유 판매, 마약밀매 등의 지하경제를 폭력조직이 휘두르고 있다.

기업형 조폭의 대표적인 범죄가 기업사냥이다. 주로 '바지사장'을 앉히고 뒤에서 불법을 저지른다. 지난해 4월, 영업이익률 30%짜리 알짜 회사였던 에스비엠이 순식간에 거덜나면서 조폭이 기업 인수합병, 주가조작 등에 나선 '기업사냥' 행각이 드러났다.

에스비엠은 2012년 매출 278억원, 영업이익 73억원을 달성한 우량 중소기업이었다. '바지사장'격인 대표의 횡령사실이 드러나 상장 폐지되면서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을 울렸다. 그러던 중 국제PJ파 조직원의 아내라고 밝힌 네티즌이 인터넷에 "범서방파 조직원이 투자를 권유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갖고 있다"고 폭로했다. 실제 당시 금융감독원에는 국제PJ파와 범서방파 소속으로 알려진 조폭의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접수돼 파장이 확산됐다.

다시 '범죄와의 전쟁' 사법당국 강력 소탕 의지

사법당국이 아예 폭력조직 범죄를 뿌리 뽑겠다고 나섰다. 지난 21일, 대검찰청 강력부는 24년 만에 집중적인 조폭 척결을 위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며칠 뒤 경찰도 절도ㆍ기업형 조폭을 100일간 집중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검경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타깃은 머리를 쓰는 '기업형 조폭'이다.

사법당국은 전통적 형태의 조폭을 검거하기 위해 주로 두목 동향 등의'첩보'를 입수하고 잠복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해왔다. 일단 두목을 검거하고 나면 조직이 와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칠성파 역시 검찰이 첩보 입수 후 한씨를 검거하는 것은 물론 간부와 행동대장 등 25명을 체포해 사실상 조직 와해를 유도했다.

기업형 조폭과의 싸움은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처럼'의리'에 죽고 못 살던 조폭은 이제 없다.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라 금전적 이득을 좇을 뿐이다. 특히 지방선거를 앞두고 사업가로 위장한 조폭과 정재계의 유착이 심화되고, 이를 빌미로 지방에서 폭력조직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수사 방향도 크게 바뀌었다. 검찰은 조직 차원의 폭력행사나 조직간 싸움이 드러날 때만 수사하는 방식에서 탈피할 것을 선언했다. 기업형 조폭의 경우 폭력이 개입되지 않았더라도 사업가로 변신한 조폭의 범죄 행위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할 계획이다. 탈세, 횡령·배임, 금융범죄 등에 대해 특수·금융수사 방식을 전면 도입하고, 범죄수익을 철저히 환수하는 게 목표다. 또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가'로 위장한 조폭과 정재계 유착이 심화되고 있고, 이를 빌미로 지방에서 폭력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척결 대상이다.

범죄 수법 교묘해지고 첨단화- 성공 혹은 실패

1차 '범죄와의 전쟁'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힌다. 당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노 전 대통령은 강력범죄를 엄격히 다스리면서 사회적 분위기 반전을 도모했다. 실제 2년간 5대 강력범죄(살인ㆍ강간ㆍ강도ㆍ절도ㆍ폭력)의 발생률이 5.9% 감소하는 등 성과를 거둬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다만 폭력조직의 실질적인 와해를 이끌어 내기보다 단기간에 조직원을 검거하는데 집중해 '보여주기식 정책'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2차 '범죄와의 전쟁'은 여러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수사의 방점은 지하경제 양성화에 찍혀 있다. 불법적 행위를 추적해 세수를 늘리는 건 본연의 일이지만, 숨어 있는 세원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관심을 받고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지하경제 양성화 성과에 관심이 몰리면서 검경에 부담이 더해진 상황이다.

하지만 1차 때와 같은 전시효과를 보는 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폭력조직의 활동영역이 넓어진 데다 범죄 수법이 첨단화되고 교묘해졌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기업형 조직을 검거하려면 탈세, 횡령, 배임 등 합법을 위장한 수법을 금융수사법을 통해 집중 수사해야 한다"면서 "눈에 보이는 폭력을 통해 범죄 사실이 드러나는 게 아닌 만큼 과거처럼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건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