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과 열등감 공존하는 사람"키 작은 것에 불만 '외모 열등감'선지자·구원자 동일시 자기애 강해장인 권신찬 목사 후계 삼은 것 후회

교계 관계자들은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신도수를 국내외를 합해 3만 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백악관 홈페이지 청원자 수가 5월30일 오전 기준으로 11만 9,290명으로 확인됐다. 구원파는 우리 사회가 예측했던 것 이상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세를 불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금력을 앞세워 사회 곳곳에 광범위한 커넥션을 형성했다. 정통교단, 검ㆍ경, 국정원 등의 사정기관 '섭외'(로비 의혹), '유병언 키즈'로 대변되는 장학생 육성, 해외선교 등의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을 들여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특히 신도들 중엔 의사, 교수, 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의 존재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유병언 전 회장은 스스로를 '발명가, 박애주의자, 화가, 기업가, 시인, 조각가, 환경운동가, 태권도 유단자, 디자이너'로 규정해 대중에 소개했다. 경기도 안성 금수원 내부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 강력한 카리스마와 신비주의적 성향을 내세워 사람을 끌어들이는 사이비 교주와 같은 모습을 연출해냈다. 종이비누를 발명하고, 스쿠알렌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자체 상표로 등록, 수출하기도 했다. (전)신도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고 "머리가 비상한 만능인" "뒤에서 하나하나 지시하고 모든 것을 조종하고 계획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모'라는 이름도 성경 속 선지자 모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신도들은 유 전 회장을 "이 시대의 모세"라고 믿었다고 한다. 구원파를 함께 창시한 장인 권신찬 목사는 모세의 형이자 대언자였던 '아론'에, 그 자신은 모세라고 선전했다. 스스로를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선지자이자 구원자와 동일시할 만큼 자기애와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 전 회장의 자기애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높은 곳에 위치한 자신의 창에서 보이는 자연을 소재로 사진을 찍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자연을 묘사한 것이다. '내 창에서'(Through my window)라는 그의 사진 콘셉트는 '신과 같은 위치'라는 은유라 할 만하다. 여기에 '아해'라는 가명 뒤에 숨어 자신은 나서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평범하고 소박한 사진들이 일종의 '신비성'을 띠도록 유도했다. 자연의 웅장함을 표현한 그의 빅 사이즈 사진들은 최근의 사진 경향에서 유럽인들에게 오히려 참신함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은 높은 자기애와 자존심만큼 열등감도 깊었던 인물로 보인다. <주간한국>이 만난 복수의 신도들은 유 전 회장에 대해 "외모에 열등감이 강했다"며 "특히 키가 작은 것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 그래서인지 외모를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 왔다.

1970년대부터 유 전 회장과 신앙생활을 시작한 구원파 전 신도 최모씨는 "유씨는 매우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라며 "열등감이 높은 자존심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금 현상금이 5억이 걸려 있는데, '내가 5억짜리밖에 안 되나'라고 여길 거다. 신도들에게 강탈한 부를 자식과 여자에게 쏟아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장 진용식 목사는 "유씨는 엄청난 돈을 끌어 모으고 여자와 관련한 소문도 들리는 2가지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며 이것이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라고 했다.

오늘날의 유 전 회장을 만든 장인 권신찬 목사와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유 전 회장은1972년, 극동방송 부국장에 취임했다. 불과 31세, 고졸 학력으로선 파격적인 인사였다. 당시 운영이 어려웠던 극동방송에 유 전 회장이 파격적인 후원금을 낸데다 권 목사가 방송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뤄진 일이었다고 한다. 권 목사는 극동방송에서 선교부장을 맡고 있었고, 자신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심양면 힘을 실어줬던 사위 유 전 회장은 권 목사가 생각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한 구원파 전 신도는 "권 목사는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유씨는 사업에 몰두했는데 결국 유씨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됐다"며 "둘의 사이가 좋았다곤 볼 수 없다. 갈등이 계속 누적됐기 때문이다. 권 목사가 나중엔 후계자로 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특히 "오대양 사건 때 충격이 크셨다"며 안타까워했다. 그후 권 목사는 1996년 유명을 달리했다.

한편 진 목사는 "비종교인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통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사이비 종교에 미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제한 뒤 "이들은 부유한 이들만 골라 접근한다. 세뇌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습시키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교주를 신격화하고 자기들만이 진리이고 다른 곳은 다 가짜라고 가르친다. 이단을 탈퇴한다고 해도 교리는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신상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