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생각하면 가슴에 묻지도 못해" 범죄피해자들 '상상초월 고통'… 남겨진 가족은 억울한 몸부림"정신적 혼란 상태 계속되면 일상적인 생활 누릴 수 없어"

살인이나 강도, 성폭행과 같은 강력 범죄를 당한 피해자와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목숨보다 아꼈던 가족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면 가족의 삶은 완전히 무너진다. 국민적 관심을 받던 사건들도 예외는 아니다.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사람들도 무뎌진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은 처절한 고통에 시달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억울함을 풀기 위해 몸부림친다. 남은 자의 삶을 쫓아가 보았다.

딸 죽음 진실 밝혀낸 어머니

유미자씨(56)씨는 무게 10kg은 거뜬히 나갈 주황색 배낭을 커피숍 탁자에 내려놓더니 지퍼를 열고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본래 흰색이었을 A4용지는 까맣게 손때가 묻었다. 한 뭉치당 족히 수백 장의 종이를 곳곳마다 포스트잇으로 나누고 색색의 연필로 칠해놓았다. 곳곳에는 누렇게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유씨가 짊어진 배낭에 담긴 서류는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딸 황인희씨의 오명을 벗기기 위한 기록들이다. 2005년 5월31일 한 공기업에 다니던 유씨의 딸 황씨(당시 22세)가 같은 회사 인사과장 이모씨(당시 38세)에게 살해당하면서 엄마의 시계는 그곳에 멈춰버렸다. 유씨는 10년째 이 사건을 쫓고 있다. 전국을 누비며 경찰 못지 않은 수사관이 됐고, 검찰의 얘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 법을 공부했다.

당시 경찰은 직장 내 내연관계에 의한 치정사건으로 여겼다. 어머니의 힘은 위대하다 하던가. 홀로 딸의 죽음이 남긴 의문을 쫓기 시작한 끝에 내연녀가 아님을 증명했다. 유씨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성폭행 의혹 수사 촉구와 해당 공기업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유씨는 "자식 일에 부모만큼 열성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더라"며 "딸의 얼굴이 밟혀서 진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15년 만에 실낱 희망 건 어머니

1999년 5월20일 오전 대구 동구 효목동 골목길에서 태완군은 괴한이 던진 황산을 뒤집어썼다. 병원에서 49일간 사투를 벌이던 태완군은 안타깝게 숨졌지만, 태완군에게 황산을 던진 범인은 지금까지 잡지 못했다. 당시 태완군은 일관되게 이웃 주민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경찰은 초동수사에서 A씨가 범인이라는 단서를 잡지 못했고, 태완군의 진술과 태완군 친구의 진술 등을 묵살했다.

'대구 황산테러' 사건 피해자 김태완(당시 6세)군의 어머니 박정숙(50)씨는 15년만에 죽은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희망이 생겼다. 박씨 부부는 공소시효 만료 3일을 앞두고 검찰에 재정신청을 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는데, 이를 멈춰 세운 것이다. 11일 현재 이 사건은 대구고등법원 제 형사3부가 심사를 담당하고 있는데, 법원의 결정에 따라 검찰이 사건 수사 재개 여부가 결정된다.

박씨 부부는 사건 발생 후 태완군이 숨지기까지 실시한 300분간의 녹화자료를 전문가가 분석한 결과 태완군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A씨가 주장한 알리바이는 목격자 진술과 일치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태완군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혐의를 입증할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도 같은 입장으로 A씨를 불기소 처분한 터여서 법원의 고민이 커지게 됐다.

박씨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고 초기 열흘간 경찰의 초동 수사 회의가 용의자인 A씨 집에서 이뤄졌는데 초동 수사에서 찾아내야 할 것들을 어떻게 찾겠느냐"면서 "경찰은 수사 본부가 아니라 수사 회의라고 하는데 사고 피해 당사자 부모 집도 아닌 일반인의 집에서 수사회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경찰의 초기 수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박씨는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 하는데 가슴에도 못 묻고 살았다"며 "태완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전에는 묻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피해자 만나는 경찰 역할 중요"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르면 범죄피해자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피해를 당한 사람과 그 배우자, 직계 친족 및 형제자매를 말한다. 최근에는 범죄피해 방지 및 범죄피해자 구조 활동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도 포함된다.

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들은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 심각한 정신적 피해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거나 불면증, 공허함, 불안 등을 겪고 일상생활에서 큰 고통을 받는다. 실질적으로 뇌손상이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져버리는 '무능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김창윤 경남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의 범죄피해자 정책 실태와 개선방안'논문에서 범죄피해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경찰의 역할은 중요성을 지적했다. 범죄피해자 보호에 있어서 경찰의 역할이 절대적임에도 불구하고 2004년 관련 훈령이 제정된 후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경찰과 검찰, 법원, 교정기관, 민간단체 등이 긴밀하게 협조해 범죄피해자들의 고통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피해자보호 종합정책을 수립해 지역경찰이 피해자 보호업무를 강화하고 피해자방문 횟수를 방범심방 횟수에 포함시키는 등 경찰 내부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며 "통합피해자지원시스템을 도입해 피해자의 권리를 종합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