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 계약 유도해 차량 가로챈 뒤 사채업자에 넘겨경찰 백억원대 자동차 리스 사기 조직 꼬리잡아

지난해 6월 중순경 의사들에게 “고급 외제차를 타게 해주겠다”며 자동차 리스 계약을 하게 한 뒤, 리스차량을 가로채 사채업자에게 넘기는 수법으로 수십억 원을 챙긴 의사가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자동차 리스를 이용한 신종 사기로 그 동안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개별 범죄로 경찰은 봐왔다. 하지만 최근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다니는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정황이 포착돼 경찰이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수법이 지난해 발생한 사건과 거의 흡사해 동일범 또는 동일범과 연결된 조직 일당의 소행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지난해 사건을 살펴보면 당시 서울 강남경찰서는 사기 등의 혐의로 박모(42)씨를 구속했다. 또 박씨로부터 차량을 넘겨받아 유통시킨 사채업자 김모(36)씨 등 2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박씨는 지난 2011년 6월부터 올해 3월까지 의사 15명을 상대로 “고급 외제차를 타게 해주겠다”며 리스계약을 하도록 한 뒤, 외제차 20대를 가로채 사채업자에게 대당 3,000~4,000만원에 넘겨 23억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병원 개설을 앞둔 의사들을 노린 것으로 경찰조사에서 드러났다. 박씨는 “개원하려면 대출금이 필요한데 BMW 740 등과 같은 고가의 외제차를 갖고 있으면 대출금도 많이 나온다”고 속여 리스계약을 맺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기존에 빚을 지고 있던 지인들에게 접근해 “어차피 빚을 갚아야 하는데 차량을 리스하면 비용을 대납해 빌린 돈을 모두 갚겠다”고 속여 수억 원의 피해를 떠안기기도 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명문대 의과대학원 출신에다 의료기기 리스회사를 운영하는 박씨는 의사이자 사업가인 신분을 이용해 피해자들을 쉽게 속일 수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교묘한 수법에 코 베여

피해자인 조모(58)씨가 피의자 김모(41)를 만난 것은 지난 8월 15일경. 법인사업자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조씨는 평소 신용등급이 낮아 자기명의 사업체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조씨는 우연히 지인을 통해 김씨를 알게 됐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말에 솔깃했다.

처음 서울 동대문구 회기역 주변에서 김씨를 만난 조씨는 김씨로부터 “차량구입, 매매 및 법인대출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며 그 자리에서 대출방법과 대출자격 등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 놓았다. 사업체를 차리기 위해 자금을 구하고 있던 조씨가 그의 설명에 눈을 반짝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같은 달 21일 장한평 소재 한 커피숍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했다. 조씨는 “차후 대출을 할 때 은행자서에 필요하다”며 조씨에게 인감증명서, 주민등록증 사본, 근로소득원천징수 영수증 등 각종 구비서류와 조씨 명의의 휴대폰, 현금카드 등을 요구했다.

조씨는 내심 꺼림직했지만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생각에 김씨가 원하는 서류들을 순순히 내줬다.

김씨는 이 때 “조사장님은 신용등급이 낮아 법인대출을 위한 대표이사 취임조건의 등급에 미치지 못한다”며 “최소 5등급 이상이 되어야 하니 고가의 외제차량을 캐피탈을 이용해 구입하면 대출이 수월하다”고 사탕발림했다.

또 김씨는 “캐피탈을 통해 구입한 차량을 나에게 인도해주면 20여일 후 제 3자 명의로 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도록 해 주겠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으로 다시 구입한 차량의 할부금을 전액 일시상환하면 신용등급이 최소 2등급 이상 상향된다”고 속였다.

조씨는 차량구매가 목적이 아니라 신용등급이 상향조정될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차량을 구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라진 김씨 공범 여부는?

이렇게 해서 조씨는 같은 달 27일 김씨의 직원이라고 알려진 인물과 함께 안양시 동안구 소재의 고급 외제차 매장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이 매장 파이낸셜에 근무하는 직원을 소개받아 고가의 외제차를 리스로 계약하고 계약금 192만원과 현대해상보험사에 보험료 161만원을 카드로 결재했다.

이틀 후 조씨는 차량을 인도했고, 이 차량을 당초 계획한대로 김씨에게 재매입을 조건으로 다시 넘겼다. 이렇게 차량을 넘겨주면서 김씨는 보관금 명복으로 2,000만원을 주기로 했지만 이를 지급하지 않았다.

이때 김씨는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조씨에 내밀며 급급하게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 순간부터 조씨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에 시달리게 됐다. 김씨는 이날 이후 차량과 함께 종적을 감췄고 조씨는 제대로 한번 타보지도 못한 차의 리스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는 외제차를 제대로 타보지도 못하고 1~2억 원에 달하는 리스비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면서 “조씨의 경우는 아니지만 과거 이 같은 사기에 당한 일부 피해자들은 파산신청을 하거나 신용카드가 정지되는 등 신용불량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또 경찰은 “종적을 감춘 김씨와 박씨의 수법이 매우 흡사하다. 박씨는 개인병원 초기 설립비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주변 의사들에게 ‘리스차가 있으면 신용도가 올라간다. 대출 받기가 좋다’라고 꾀어 이들이 외제차 리스계약을 맺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개인사업 실패 등으로 과거에 빚을 졌던 의사들에게도 외제차 리스료를 대납해주는 방식으로 이자, 원금 등을 갚겠다며 리스계약을 맺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김씨의 범행 수법이 과거 박씨와 매우 비슷하고 최근 조직적으로 이 같은 사기를 벌이는 조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김씨와 연계된 공범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리스 사기를 당해도 주변에 알려질 것을 우려한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경찰은 전국적으로 김씨 또는 김씨와 연결된 일당에게 피해를 당한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김씨에 당한 추가 피해자를 찾고 있다.

한편, 2009년에도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적 있다. 당시 유명 연예인과 프로농구 선수 등의 명의를 도용해 고급 외제차의 허위 리스 계약서를 작성한 뒤 이를 담보로 250억원을 대출받아 가로챈 수입차 판매업체 대표와 리스업체 직원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경찰은 타인 명의를 도용해 작성한 리스 계약서를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로 수입차 판매업체 대표 김모(31)씨를 구속하고 리스업체인 D캐피털 직원 채모(29)씨를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 등은 연예인 A(31)씨와 프로농구 선수 B(31)씨 등 20여명의 인감증명서를 이용해 6억원 상당의 고급 외제차 수십 여대에 대한 허위 리스계약서를 작성한 뒤 이를 담보로 D 캐피털로부터 대출을 받는 등 2006년 10월부터 작년 3월까지 모두 250억원 상당을 편취한 것으로 밝혀져 유명인들 사이에 리스 주의보가 돌기도 했다.

김씨 등은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 페라리 360 등 수억원에 달하는 이른바 ‘수퍼카’를 A 씨 명의로 6대까지 리스 계약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차량으로 계약하는 등의 수법으로 250억원 상당을 대출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