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출신 '38 따라지' 부산 국제시장 일궈… 서울 평화시장 등 거쳐 1964년 500명 브라질 이민
브라질 상파울루, 미국 LAㆍ뉴욕 등 패션 사업 진출… 세계한인변호사협회 창설 한인 위상 높여

김홍기 박사는 남은 여생을 남북 통일의 가교역할을 하는데 전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남은 여생 남북통일 가교 역할 하고파"… '해외동포처' 설치해 해외동포 지원과 조국 발전 연계 필요

영화 '국제시장'의 신기록 행진과 잔잔한 감동이 국내외서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초 '국제시장'은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2위에 올랐다. 북미 지역에서도 개봉 5주 만에 흥행 수입 200만 달러, 관객 40만명(추정)을 돌파했다.

'국제시장'은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실감있게 그려내 세대를 아우르는 감동을 주고 있다. 이는 국내 뿐만아니라 해외 동포, 외국 현지인들에게도 전달되는 양상이다.

이런 '국제시장' 열풍 속에 정작 국제시장이 어떻게 형성됐고, 그 주인공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리고 국제시장을 일군 주인공들이 오늘날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패션가와 브라질 상파울루의 패션.의류 시장을 개척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홍기박사 가족인 모친과 처, 어린 두 딸과 브라질 이민선 찌짜랭카호 선상에서 찍은 기념사진.
초창기 국제시장에서 생활했고, 현재는 세계한인변호사협회(IAKL) 창설 산파역으로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김홍기(81) 박사는 "영화 '국제시장'에 국제시장이 빠져있어'라며 뼈있는 농담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이면과 해외 이민사의 생생한 자취를 들려줬다.

김 박사는 1964년 부산에서 브라질로 해외 집단이민을 떠난 1세대로 지난해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을 계기로 한국과 브라질을 오가며 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상호 교류를 증진하는데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박사는 북한이 고향(평양)으로 브라질과 북한의 수교에 기여했고 북한 실세들과도 가까워 남북통일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현재는 남북통일 외에 해외한인의 지위 향상과 해외동포들이 조국과 연대해 함께 발전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실향민인 김 박사는 "국제시장 영화를 본 감동이 남달랐다"며 "국제시장 주역들이 이제는 뉴욕ㆍLAㆍ상파울루 등 세계 패션의 중심에서 한인 '큰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통일 조국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700여만 명의 해외동포는 조국 발전의 핵심적 존재라며 이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나라 발전과 남북통일의 기반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한 김홍기 박사.
이를 위해 김 박사는 국내의 경우 해외동포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해외(재외)동포처를 신설해 해외동포와의 협력을 도모하고 그들의 국제적 활동을 지원해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남은 여생을 남과 북이 통일이 돼 세계 강국으로 인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우선적으로 이바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과 연계된 행사를 위해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김 박사를 만나 국제시장으로 상징되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과 세계 속 한인들의 활동, 남북통일과 관련된 고견 등을 들어봤다.

김홍기 박사 고향이 평양으로 20대 대 가족이 월남했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내려와 지금의 국제시장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터전을 잡은 김 박사 가족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 서울로 올라와 동대문 시장, 평화시장 일대에서 일을 하며 지냈다.

법률소비자연맹이 주최하는 ‘제3회 대한민국법률대상’ 시상식에서 ‘해외동포’ 부분을 수상한 김홍기 박사가 참석자들과 기념행사를 하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과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참석하였다.
1964년 초 김 박사는 당시 월남 출신 상인들과 함께 정부에서 추진하는 브라질 영농이민을 자원했다. 부친을 일찍 여읜 김 박사는 그해 8월 모친과 부인, 두 딸을 데리고 브라질 이민선에 올랐다. 당시 브라질 이민단은 500명으로 김 박사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지도력을 인정받아 인솔단장을 맡았다.

두 달의 고행 끝에 브라질에 도착한 김 박사 일행은 영농이민 국제사기로 인해 사실상 '빈손'으로 브라질 이민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부지런한 이민자들은 고생을 해가며 브라질에 정착했고, 높은 교육열로 후세들을 이곳 명문 대학에 진학시켜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브라질 부유층의 도시이자 패션의 대명사인 상파울루만 해도 이곳 패션과 의류를 한인들이 장악하고 있다. 일찍 브라질에 정착한 일본인이 200만명이나 되지만 10만여 명의 한인들이 브라질 의류산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김 박사의 경우 브라질 이민 초기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현지어(포루투갈어)에 능통해 교사, 컨설턴트, 변호사 등을 거치면서 브라질 오피니언 그룹과 교류했다. 1974년 부터 변호사 및 법대교수로 활약 하던중 브라질 정치활동을 하게 됐고, 브라질과 북한의 수교를 이끌어내는 데 막후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브라질에서 미국 LA로 옮긴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1983년 LA에서 세계한인변호사협회(IAKL) 설립을 추진, 1988년에 창립출범을 뉴욕에서 하였다. 전 세계 한인 변호사들의 네트워크 역할도 하는 세계한인변호사협회는 2013년 총회를 서울 고려대에서 개최했다. .

1964년 제2차 브라질 이민단 500명을 리우데자네이로항까지 실어 날랐던 화란(네덜란드) 국적의 7천톤급 화물선 ‘찌짜랭카’호.
김 박사는 고향인 북한과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북한-브라질 수교는 물론, 북한의 평화적 국제 활동에도 숨은 조력자 역할을 했다. 1991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IPU 총회 때는 브라질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 거의 50면 만에 고향인 평양에 금의환양하기도 했다.

한국과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김 박사는 북한의 김달현 부총리(2000년 사망),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 실세들과도 가까워 해외동포 및 남북 협력과 통일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다.

브라질 한인이민 50주년 행사와 관련해 한국을 찾은 김 박사는 젊은 세대들이 남북통일에 대해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며 한민족의 웅비를 위해서라도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남은 여생을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전력하겠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대화를 시작하면서 한국에 와 관람했다는 '국제시장'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 '국제시장'엔 정작 국제시장이 안보이더군"하며 화두 같은 물음을 던져왔다.

IPU브라질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던 당시 김홍기 박사(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 영화 '국제시장'에서 국제시장이 안보인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국제시장이 어떻게 형성됐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제시장을 이룬 주역들이 그후 어떻게 됐는가 하는 겁니다. 6ㆍ25 전쟁중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는데 국제시장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고 주로 봉제일을 했어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미군에서 빠져나온 물품이 거래된 곳도 국제시장이지요. 반면 음식 장사들은 주로 자갈치 시장에 몰려 있었죠. 그렇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남으로 내려와 부산국제시장에서 터를 잡았던 속칭 '38따라지' 출신들은 약간의 돈을 모은 후 서울로 올라가 평화시장,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됐죠. 이들 중 브라질로 이민간 사람들이 오늘날 브라질 패션ㆍ의류업 중심인 상파울루를 접수하다시피 했지요. 이들은 또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들이 많은 LA와 뉴욕의 패션가에서 자리를 잡았어요. 국제시장 속편이나 2편을 다시 만들어야 할 만한 얘기들이죠?"

- 1960년대 당시만해도 드물게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는데 브라질로 이민을 간 동기가 궁금합니다.

"나는 이북(평양)출신으로 유복하게 살다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이에요. 당시 북한은 국민소득이 100달러에 육박했고 남한은 절반가량인 65∼68달러 정도였죠. 여기에다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돼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궁핍한 삶에 부대끼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답답했어요. 혈기왕성한 젊은 때였으니까요. 때마침 브라질 이민 얘기를 듣고 한반도 보다 거의 100배에 가까운 광활하고 풍요로운 자원대국 브라질에 가서 젊을 꿈을 펼쳐보자 하는 나름의 포부를 갖고 동행자들과 함께 배를 타게 된거죠."

- 국제시장 영화에는 파독 간호사ㆍ광부 얘기가 나오는데 브라질 이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브라질 이민사를 이해하려면 대한민국의 이민역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첫 번째 집단이민은 1902년 대한제국 고종황제 칙령에 따른 하와이'농노동 청년이민(102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63년에 시작된 파독광부ㆍ간호사와 브라질이민이 현대사적 의미의 두 번째 집단이민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 이민정책을 이제와 돌이켜 보면 박정희정권이 추진한 '혁명적 발상의 위업'이 아니었나 생각되요. 당시는 해방과 전쟁 후라 국민들은 '보릿고개'로 신음하고 있었고 국가재정 역시 말할 것도 없었죠. 더구나 3%에 가까운 인구증가율로 사람들을 해외로 내보내 입을 줄이고 약간의 자본이 있던 사람들한테는 해외에 나가 자력갱생토록 권장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해외 이민은 1963년도에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파독광부와 간호사, 월남파병, 가족집단 정책이민이 3대 핵심사업이었고, 그 일환으로 지구 반대편 나라 브라질로 떠나게 됐죠."

-브라질 이민은 농업이민으로 농사지을 사람들을 보내야 했는데 당시 대다수가 이북에서 내려 온 실향민이거나 남대문, 동대문, 평화시장 등지에서 봉제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브라질 이민을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앞서 얘기했듯 이북에서 내려와 부산 국제시장에서 터를 잡았던 '38따라지' 출신들은 서울로 올라와 대부분 평화시장, 동대문시장 상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국가재정이 어렵다보니 무차별적으로 세금을 걷었어요. 소위 '인정과세'라는 악명 높은 세법인데요. 세무당국은 이들 장사꾼들을 '상습탈세집단'으로 여겨 무조건 주먹구구식으로 세금을 강제로 걷었어요. 당시 상인들 대부분은 이북출신으로 뿌리를 내리기 전이라 남한에 별 애착이 없었고 세금 징수에 억울해 하고 있던 터라 브라질 이민을 대거 지원했지요."

- 브라질 이민을 떠날 때의 당시 상황을 말씀하신다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1964년 8월 15일, 두툼한 가방과 보따리를 이고 진 500여 명의 사람들이 부산항 제3부두로 모여들었어요. 이들을 태우기 위해 부두에는 7000천톤급 네덜란드국적 화물선 '찌짜랭카'호가 정박해 있었죠.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80세 고령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습니다. 나도 모친과 아내, 어린 두 딸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 나이 서른에 이민자 500명의 인솔단장을 맡았는데 사연이 궁금합니다.

"본래 브라질 이민은 3월달에 가기로 됐었어요. 그런데 계속 지체되니까 걱정과 불안이 팽배했지요. 그런데 아무도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책임자들에게 문제제기를 했는데 나중에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속얘기를 시원스럽게 해줬다며 투표로 나를 단장으로 뽑았어요. 막상 단장이 되니 책임감도 생기고, 브라질에 가면서 어렵게 구한 포루투갈어 책으로 배 안에서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큰 도움이 됐죠."

-브라질에 당도해 시작한 이민생활은 어떠했습니까.

"500명의 민단이 구입했던 땅이 몽땅 국제사기를 당해 고아나 다름없는 상화잉었어요. 갈 곳이 없어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죠. 당시 브라질 대사는 2대 대사인 박동진씨였는데 본국 훈령 없고 예산이 없다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했어요. 앞서 브라질에 온 동포들이 농장에서 도저히 일할 수 없어 상파울루 등 도시로 나갔는데 마치 국가정책에 위반해 농장을 탈출한 것으로 허위보고 하고, 우리 이민자들도 그럴 위험이 있다며 방치한 것이었죠. 하는 수없이 단장으로서 앞서 정착한 한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빈손'인 상태로 생활하게 됐죠. 내 가족도 동포들이 일하는 농장 마구간에서 열흘 동안 지냈어요. 농사일을 할려고 했지만 주변에 큰 뱀이 득실거리고 잠자리 만한 모기들로 생활하기가 어려웠어요. 소유한 농토도 없고 농사일도 힘들던 차에 귀동냥으로 일본인들 100만 명이 상파울루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동양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자는 암묵적 동의하에 무작정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죠. 그리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브라질에서 정착해 성공한 이민사회를 열어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전화위복이랄까, 농사일을 할 수 없어 도시로 나간 게 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빨리 정착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현재 브라질에서 교민들의 위상과 실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지요

"50년 전 가내공업 수준의 재봉틀 한 대로 시작한 의류산업을 동포 1세대들이 지구 반대편 브라질 상파울루에 뿌리를 내리고 양적성장의 기반을 닦아놨습니다. 오늘날에는 수백 여 명의 일류대 출신 동포1.5∼2세들에 의해 전산화, 패션화, 고급화, 브랜드화 되는 등 패션의 질적 성장으로 이제 거대 브라질 2억 시장을 장악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의류산업뿐만 아니라 최근 20여 년 동안 브라질에서 이룩한 한국의 자동차 산업도 눈부십니다. 현대와 기아차는 연간 15만대를 만들 수 있는 현지 생산 공장이 있고 남미 전역에 판매망도 갖추고 있습니다. 이같을 기반을 쌓는데는 수백 명에 달하는 고급 전문경영인들의 노력이 있었는데 자랑스럽게도 이들 모두가 우리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 박사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민 초기에 나는 영어와 포루투갈어를 할 수 있어 상파울루로 가기 전 모지라는 도시에서 영어교사를 했어요. 이후 브라질리아를 수도로 건설하는 과정에 그곳에서 좋은 조건으로 정착할 수 있었는데 상파울루 동포들이 어려운 처지를 호소해와 그들의 대변인을 자처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가 정착하게 됐지요. 상파울로에서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됐고 브라질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이민가기 전 한국에서 낳은 두 딸은 상파울루 치과대학을 나와 모두 교수와 치과의사로 재직 중이고, 상파울루에서 낳은 큰 아들은 의류사업, 막내 아들은 미국 LA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 브라질 이민 역사가 50년이 됐는데 의미를 말씀한다면.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꿈꾸었던 '한민족 해외 대웅비 100년 대계'의 위업이 현실이 된 만큼 브라질한인이미사는 전 세계 175개국 700여만 명 재외동포사회 가운데 '최고의 한민족 경제사회'를 이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브라질이민 50년 역사는 브라질 동포들만의 축제로 그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전 세계 해외동포들이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 만큼 의미가 있고 그래서 이 의미가 확산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도 동분서주하고 있지요. 브라질만 보면 향후 브라질 동포사회가 한국, 그리고 북한까지 브라질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발전적 관계를 이뤄가느냐가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민 1세대로서 앞으로 주력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전 세계 해외동포들이 보다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며 조국과 연대해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일메 매진할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향이 북한이기도 하지만 남과 북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통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실감합니다. 남은 여생을 남북통일의 가교 역할을 하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남북통일에 대해선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반드시 이뤄야 할 일이라고 봐요. 나 같은 경우는 남과 북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한반도 분단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요. 그런 만큼 통일에 어떠한 역할을 할려고 해요. 남과 북을 다니면서 그런 일에 일조하고 미국 유력 정치인들과의 만남에서도 한반도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현재 한반도 주변 4강과 EU까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 '중립국 통일'로 나아가는 '골든 아퍼튜니티(golden opportunity)'라고 봐요. 황금 같은 기회를 잘 살리면 통일도 머지 않다고 봅니다."

-해외 동포들이나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해외 동포들이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국력도 크게 성장했고 한국인은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자부심은 각자의 노력 못지 않게 대한민국 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서는 해외동포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자 사업 역군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외교부 산하에 해외(재외)동포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해 해외동포의 위상을 높이고 이들의 역할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해외동포들도 더욱 조국애와 자긍심을 갖고 대한민국 발전에도 기여하겠지요,"

● 김홍기 박사 프로필

상파울로 샌프란시스코 법대 졸업 -상파울로 주립대 박사(국가경제법)

법학박사, 변호사.

세계한인변호사협회 명예회장

대한변호사협회 국제자문위원

세계한인정치인 협의회 고문

UN-NG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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