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공방' 2R… 직접 증거 요구돼경찰, "물증·정황 증거 충분"… 용의자 확실시용의자 측 "정말 모른다. 누군가 죄 덮어씌워"전문가 "간접 증거로 부족, 직접 증거 제시해야"

'농약 사이다' 살해사건 피의자 박모(82) 할머니의 사위가 20일오후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에서 경찰 수사에 항의하며 기자들에게 드링크제 병의 제조번호를 설명하고 있다.
경북 상주에서 발생한 '농약 사이다' 살해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경찰과 용의자 간에 '진실게임'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경찰은 물증과 정황증거 등을 토대로 용의자를 독극물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용의자는 범행을 부인하고 가족들도 "누명을 썼다"며 반발하고 있다.

법원은 용의자에 구속영장을 발부해 경찰에 힘을 실어줬지만 사건의 실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경찰은 24일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는 입장이지만 검찰에서 '진실'이 밝혀질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증거 불충분에다 경찰의 무리한 수사를 지적하기도 해 이번 사건이 자칫 2004년 대구 '독극물 요구르트' 사건, 2007년 경북 영천 '농약 드링크' 사건처럼 미궁으로 빠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는 상주 '농약 사이다' 살인사건의 전말을 추적했다.

'농약 사이다' 살해사건의 피의자 박모(82) 할머니가 20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제1호 법정에 들어가고 있다.
박씨 집성촌 쑥대밭 되다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7월 13일, 상주시 금계1리 마을 사람들은 초복을 맞아 삼계탕을 나눠 먹었다. 마을은 42가구에 86명이 살며 주민 30%가 박씨 성을 가진 박씨 집성촌으로 사이좋게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잔치 다음날인 14일,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전날 마을잔치 때 마시고 남은 사이다를 마신 할머니 7명 중 6명이 거품을 토하며 쓰러졌다. 이중 신모 할머니(65)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마을회관 밖으로 나왔고 용의자 박모 할머니(82)도 신씨를 뒤쫓아 문밖으로 나왔다. 마침 마을회관으로 들어오던 주민 박모 할머니(63)가 이를 발견해 119에 신고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이다에 고독성 살충제가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다음날 15일 김천의료원서 치료받던 정모(81) 할머니가 사망했다. 경찰은 17일 농약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씨를 용의자로 체포하고 집을 압수수색했다. 다음날 경북대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던 라모(89) 할머니가 사망했고, 나머지 4명 중 3명은 여전히 중태다.

경찰은 18일 박씨에 대해 살인혐의로 구속영장 신청했고, 법원은 20일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 박모 할머니 용의자로 간주

경찰은 사건 초기, 누군가 사람을 해치기 위해 사이다에 농약을 섞은 것으로 파악했고, 외부인이 목격됐다는 증언이 없는 것을 근거로 마을주민 80여명을 용의 선상에 올린 후 수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조사 나흘만에 사건 현장에 있던 박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이 박씨를 용의자로 특정한 것은 물증과 박씨의 의심스런 행적 때문이다. 경찰은 17일 박씨 집에서 살충제가 든, 뚜껑 없는 드링크제를 발견해 박씨를 용의자로 보고 검거했다.

사이다와 드링크제의 살충제 성분은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살충제는 2012년 판매금지된 고독성 농약이다. 사건 현장에는 1.5ℓ 사이다 페트병에 드링크제 병뚜껑이 끼워져 있었다. 또 살충제가 남은 드링크제와 할머니 집에 보관된 드링크제들의 유효기간이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경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박씨 집의 뒤뜰 담 부근에서 살충제병이 든 검은색 비닐봉지를 찾아 결정적인 증거물로 압수했다. 이 농약병 겉면에는 6명이 마신 사이다에 든 살충제와 같은 제품의 명칭이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또 사건 당일 박 할머니가 입은 옷과 타고 다니던 전동스쿠터 손잡이에서 범행에 사용한 살충제와 같은 성분이 검출됐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통보를 받았다.

사건 발생 후 박씨의 행적과 진술 등에서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사건 당시 박씨 집 앞에 설치된 CCTV와 119구급차 블랙박스 기록을 유력한 단서로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사건 발생일인 14일, 박씨는 노인용 소형 전동차를 타고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정반대 방향인 마을 입구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CCTV에 남았다. 경찰은 박씨가 알리바이를 만들고자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CCTV에 드러낸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또한, 구급차 블랙박스에 담긴 영상에서 박씨는 구급차가 마을회관으로 들어와 한 할머니를 태우고 마을을 빠져나갈 때 회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구급차 반대편 쪽 먼 산을 바라봤고, 마을회관에 할머니 5명이 쓰러져있다는 사실을 구조대에 알리지 않았다.

경찰은 상식적으로 구급차가 왔을 때 회관 내의 피해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데 구급대원들이 떠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 회관 안에 있던 할머니들을 방치했다고 밝혔다.

또한, 박씨의 옷과 스쿠터 손잡이 등에서 농약 성분이 발견됐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박씨 측은 피해 할머니들이 내뱉은 거품과 토사물을 닦아주다 묻은 것이라고 하지만 경찰은 숨진 할머니의 위액, 토사물 등 타액에서는 농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농약 성분이 묻어있던 박 씨의 옷 부위도 바지 주머니 안쪽과 바지 밑단, 상의 단추 부분 등이라 토사물을 닦은 곳이라고 보기엔 힘든 부분들이라는 입장이다.

용의자 박씨 "억울, 누군가 모함"

용의자 박씨는 "농약은 내가 구입한 적이 없고, 그 농약이 뭔지 모른다.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것 같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박씨 가족도 "홀로 사시면서 마당에 작은 텃밭을 일구시는데 올해 가루 제초제를 사 드린 적이 있지만 경찰이 발견했다는 살충제는 전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정말 그렇게(농약 사이다 제조) 했다면 결정적 증거가 될 물건들을 눈에 잘 띄는 집 주변에 그대로 두겠냐"고 반문했다.

박씨 아들은 18일 집 마당 창고 옆에서 농약병과 농약 가루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발견해 직접 들고 와 신고를 했다. 박씨 측은 누군가 박씨의 집에 농약 봉지를 두고 간 것으로 보인다며 '제3의 인물'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피해 할머니의 한 집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과 같은 성분의 고독성 살충제가 발견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박씨 아들은 24일 "살충제가 여러 곳에서 발견될 정도로 농가에 흔히 보관돼 있다. 따라서 어머니 집에서 살충제가 발견된 점을 결정적인 증거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옷 등에서 살충제 성분이 나온 것에 대해 "사이다를 마신 한 할머니 입에서 거품이 나왔기 때문에 이를 닦아 주다가 묻은 것 같다"고 했다. 박씨 말대로라면 농약이 묻기 어려운 부위에서 발견된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는 경찰의 주장에 대해 박씨 측은 농약이 묻게 된 경위를 설명할 수 있고 박씨의 말을 경찰이 단정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CCTV와 구급차 블랙박스에 담긴 박씨의 행적에 대해서도 일부 변호사는 "그것은 간접 증거일 뿐이며 박씨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것이 증거를 감추기 위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것인지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구급차가 왔을 때 박씨의 행동을 문제삼지만 주관적 판단으로 보이며, 박씨가 자신의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했다.

주민 진술 엇갈려…직접 증거 요구돼

용의자 박씨에 대한 주민 진술도 엇갈려 수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사이다를 마시고 현재 중태에 빠진 한 피해자의 아들은 "화투를 치다가 다퉜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엄마가 돈을 많이 따는 편인데 원한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 중 의식을 회복한 신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마을로 시집온 뒤 70년 같이 살았다. 본토박이고 성격이 온화하다. 사이 나쁜 거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사망한 라씨의 아들도 "박씨 할머니는 좋은 분이다. 어머니 한테도 형님, 형님 하며 살갑게 지냈다"고 말했다.

마을의 한 주민은 "화투를 치다가 말다툼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로 무슨 문제냐"면서 "점당 10원짜리 화투를 치다가 원수질 일이 뭐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수사 과정에서 직접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양측의 진실공방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민정 인턴기자 mjk@hankooki.com